우리 반 아이들은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 외곽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조금만 나가면 자연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지만 부모님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있다. 공동체의 유대 관계가 끈끈했던 옛날이야기다. 마을이 사라진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내가 근무했던 나나초등학교 마을공동체가 그것이었다.
5월 중순쯤 활동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매년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마을탐구프로젝트’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을에 대해 잘 모르기는 나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기껏해야 확대한 인터넷 지도나 사진 자료를 통해 마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직접 고장을 돌아볼 수 있다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동료 교사들과 함께 마을공동체 사무실로 갔다.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마을활동가 양 선생님이 소개를 했다.
“저는 십 년 전 이 마을로 이사를 왔어요. 우연히 길을 가다 농업생태공원에서 모심기를 한다는 현수막을 보게 되었죠. 시골에서 자란 경험을 살려 우리 아이들에게 농사 체험을 해주려고 신청했다가 마을 활동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답니다.”
마을공동체에서는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고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직은 먼 이야기지만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양선생님의 말에 놀랐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해 기꺼이 내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을 줄 아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양 선생님으로부터 ‘마을탐구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들었다. 아이들이 걸어 다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 경우를 위한 대비책까지 마련해 두었다. 양선생님을 비롯한 마을활동가분들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직접 발로 뛰기도 하고 자료조사도 많이 하신 것 같았다. 우리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을 그분들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마을 탐구는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되었다. 초여름에 가까운 날씨에 4킬로를 걷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색다른 경험을 앞두고 잔뜩 들떠 있었다. 개인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길을 건널 때 주의하라는 안전교육을 하고 학교를 나섰다.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아이들의 말소리가 커지고 표정도 풍부해졌다. 아이들이 즐거울수록 인솔하는 교사의 얼굴은 굳어지게 마련이다.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를 안전사고 때문에 늘 주변을 살펴야 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행사라도 안전사고가 나면 안 하느니 보다 못하게 된다. 그래서 체험학습을 다녀오는 날이면 유난히 피곤하고 힘들다.
아이들을 인솔하고 마을길을 가는데 어른들이 길을 양보해 주었다. 때로는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어른들도 있었다.
첫 번째 코스는 마을 중심에 자리한 공원이었다. 마을 활동가가 기다리고 있다가 고무줄놀이, 오징어 놀이 등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툭 터진 데서 마음껏 소리치며 뛰어놀았다.
주민센터를 방문한 다음 고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는 사당으로 갔다. 입구에 수령이 삼백 년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사당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느껴졌다. 고색창연한 기와지붕 아래 툇마루에 앉아 있으니 시간 여행을 온 듯했다.
마지막 코스인 농업생태공원으로 향했다. 나지막한 산자락에 다랭이논이 붙어 있었다. 원래는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설 계획이었는데 뜻이 있는 마을 사람들이 반대해서 겨우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이들의 생태교육장이자 마을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논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마을 주민이 함께 만들어 간다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마을을 다 돌아보고 나니 그새 정오가 되었다. 햇볕은 점점 뜨거워지고 아이들의 걸음걸이는 소처럼 느려졌다. 한 번도 제 발로 걸어 마을을 돌아보지 않았던 아이들이라 긴 여정이 힘겨웠을 것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학교로 향했다.
“선생님, 가온이가 안 보여요.”
학교에 거의 다 왔을 때 누군가 외쳤다. 돌아보니 가온이 뿐 아니라 도훈이, 영재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나 싶었다. 남은 아이들에게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게 하고 가온이와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 부랴부랴 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때 저만치 세 아이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속이 타 죽겠는데 세 아이는 아주 여유 만만했다.
“거기서 뭐 해? 빨리 와!”
크게 소리치자 그제야 놀라 달려왔다. 헐레벌떡 달려온 아이들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오물거렸다. 늦은 이유를 물으니 가온이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저기 앞에 지나오는데 떡이 있어서…….”
“뭐라고?”
어이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아이들 볼이 볼록 솟아 있고 한 손에는 분홍색 꿀떡이 들려있었다. 시식 떡을 발견하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떡집 주인이 아는 분이라서 더 먹으라고 줬어요.”
도훈이가 자기 잘못은 없다는 듯 핑계를 댔다.
“다른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
“…….”
“너희들만 배고픈 줄 알아?”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감정적으로 대처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을 참지 못했다. 평소대로라면 “배가 많이 고팠구나? 하지만 다른 아이들도 배고프겠지?”하며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했어야 했다. 하지만 경청과 공감은커녕 아이들을 몰아세우기 바빴다. 누가 먼저 먹자고 했는지, 그런다고 같이 먹어야 되는지, 단체 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번호까지 붙여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 또한 배고프고 지친 상태여서 더 참을성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화를 내면 마음이 가벼워지기는커녕 오히려 감정만 상할 뿐이다. 화를 내서 아이들을 순응하게 만들면 다음에는 더 큰 화를 내야 말을 듣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현명하지 못했다.
그나마 그때는 그렇게 호통이라도 쳐가며 훈육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백팔십도 달라졌다. 힘없이 침몰한 교권 추락으로 인해 설령 아이들의 잘못을 보고도 나무라기 힘들다. 운이 나쁘면 학부모에게‘아동정서학대’ 혐의로 신고당하기 때문이다. 소송을 당하게 되면 수천만 원의 소송비를 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명예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 교사는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피해는 결국 아이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정당한 교육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 하루 빨리 아동학대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교실은 비닐하우스 같다. 햇빛도 물도 영양도 조절해 준다. 그러나 세상은 노천이다. 어떤 것은 스스로 찾지 않으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은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함께 성장하는 시민정신일 것이다.
지나가다 배가 고프면 꿀떡을 먹을 수도 있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 꿀떡을 먹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기다리는 걸 알지만 빨리 먹고 따라잡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날 내가 그렇게 야단치지 않았더라도 아이들끼리 서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시민으로서 개인의 자유는 무한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거창하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깨달음은 밖에서 오는 것보다 안에서 스스로 피어나는 것이 좋다.
2
선생님, 저 가온이에요.
한 학기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써보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마을탐구프로젝트’ 때 꿀떡을 먹고 선생님한테 야단맞은 일이 제일 생각나요.
사실 저는 떡을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꿀떡은 입에 척척 달라붙어서 싫어해요. 그런데 그날은 정말 꿀맛이었어요. 유치원 생일잔치 때 먹던 그 꿀떡하고는 차원이 달랐어요.
2학년과 3학년은 천지 차이예요. 배우는 과목 수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수학이나 과학 시간은 어렵기도 하지만 재미없어요.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쳐 주셔도 잘 다가오지 않는 것들이 많아요. 그런데 사회 시간에 ‘마을탐구프로젝트’를 한다고 해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교실을 벗어나서 공부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친구들과 마음대로 떠들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어요.
그날 아침에 저는 밥을 조금밖에 먹지 못했어요. 며칠 전부터 들떠 있어서 잘 들어가지가 않았거든요. 선생님이 길거리에서 뭘 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간식도 준비하지 않았어요.
농업생태박물관에서 올챙이를 보고 나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떡집 앞을 지나게 되었어요. 방금 한 따끈따끈한 떡들이 시식대 위에 놓여 있었어요.
‘아, 먹고 싶다.’
속으로 간절했지만 참았어요. 그런데 옆에 있던 영재가 한 개만 먹고 가자고 하는 거예요. 도훈이까지 제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못 이긴 채 따라갔어요. 딱 한 개만 먹고 바로 가려고 했지요.
분홍색 꿀떡 한 개를 재빨리 입에 넣었어요. 다른 아이들이 보면 안 되니까요.
“팡!”
그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기분이 달달해졌어요. 할아버지가 당 떨어질 때 단것을 찾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한 개로는 모자라 또 한 개를 먹었어요.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가 번개처럼 목구멍에 넣었어요. 아이들과 멀어진지도 몰랐어요. 아이들보다 꿀떡에 꽂히면 눈에 뵈는 게 없나 봐요. 자꾸자꾸 먹고 싶지만 떡집 주인 눈치가 보여서 일단 양손에 하나씩 들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어요.
“이렇게 맛있는 떡은 난생처음이다.”
그 와중에 영재가 말했어요. 아무래도 선생님 몰래 빠져나와서 더 스릴이 넘치고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손에 든 떡을 하나씩 오물거리며 걸어가는데 선생님이 저만치서 다가오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들키면 안 되겠어서 씹지도 않고 꿀떡을 삼켰어요.
“캑캑.”
하마터면 목에 걸릴 뻔했어요. 씹지 않고 꿀떡을 꿀떡 삼키면 안 된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어느 순간 꼴깍 넘어갔어요. 하마터면 꿀떡 먹다 죽을 뻔했어요.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지만 더 맛있는 걸 못 먹고 죽으면 억울하지요.
선생님이 잔뜩 화난 얼굴로 우리들을 야단쳤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었어요. 떡 먹을 손과 입은 많지만요.
“지금 무슨 시간이야?”
“…….”
“사회 시간이야. 공부 시간이라고! 그런데 너희 맘대로 단체 생활을 벗어나 마음대로 하면 되겠어? 선생님이 한 말 다 잊어먹었어?”
“…….”
“실망이야.”
실컷 야단맞고 나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어요. 다 쳐다보고 있으니까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떡 먹고 온 걸 아이들이 몰라 천만다행이었어요. ‘꿀떡 삼총사’는 선생님만 알았으니까요.
지금 와 생각하니 그때 본 건 잘 기억나지 않는데 떡 먹고 혼난 일은 생각나요. 야단맞기는 했지만 떡은 정말 최고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