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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지 않아도 괜찮아

by 방구석의 이자카야


“근데... 너 진짜 술 먹고 나한테 전화했던 거 기억 안 나?”

문득, 오래전 그의 흐릿하고 나른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당황스럽기만 했는데, 지금은 장난처럼 물으며 웃을 만큼 가까워졌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나지. 근데 그냥... 부끄러워서.”
“부끄러워서?”
“응. 그래서 그다음에 연락 못 했던 거야. 이불킥 하느라.”
“진짜?”
“아, 진짜. 나 그런 거 여자한테 처음이었거든.”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의 태연한 목소리와는 달리, 이불을 차며 부끄러워했을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때 느꼈을 그의 부끄러움이, 지금은 진심을 숨기지 못했던 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묘하게 설렜다.




“그래서... 술 취해서 그런 거야?”
“취했으니까 진심을 말한 거지.”

그는 짧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지금은 괜찮아.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었으니까.”


그의 말은 너무나 담백해서 오히려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대화가 이어지던 중, 그가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가 내 안에 깊이 묻어둔 감정을 건드렸다.


“나 그런 거 여자한테 처음이라고 했잖아.

그래서 더 부끄러웠어.”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가 나에게 다가오기 위해 얼마나 솔직했는지 느껴지자,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 사람은 진심을 다해 나에게 다가왔는데, 나는 이 사람에게 얼마나 솔직했던가?’


그 질문이 마음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담백한 태도가 한편으론 설레면서도 무서웠다.


가 진심으로 다가올수록, 밝은 모습으로 무장하며 꽁꽁 숨겨둔 어두운 모습을 들킬까 두려워졌다.

나는 고민 끝에 그에게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나, 사실 이런 적 있었어."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었는데?”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내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가 조용히 기다려주는 느낌이 들어 용기를 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전에 잘 되어가던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자살 시도했던 걸 소문으로 듣고 날 무섭다고 했...


이런 건 미리 말했어야 한다면서, 사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한테도 미리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나... 한 번 그런 적 있어.”


말하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순간,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내 불안을 잠재웠다.

“우리 누나도 그런 적 있어.”


나는 놀라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누나가 그랬을 때, 내가 누나 보호자로 살았지. 누나가 매형 만날 때까지.”


그는 짧게 웃으며 덧붙였다.

“지금은 매형이 누나 보호자야. 넘겼어.”


그는 내 불안을 가볍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안의 무게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았다.




“근데... 누나 그렇게 시도한 거, 부끄럽지 않았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가족이 아픈 건 걱정할 일이야.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고.”




그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의 말은 단호하면서도 따뜻하게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우리 가족은... 달랐어. 내가 병원 다닐 때도, 뒷문으로 몰래 다녔거든. 사람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일처럼.”


그는 잠시 내 말을 가만히 듣더니 차분히 말했다.
“그건 네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네 가족이 잘못된 생각을 한 거야. 네가 걱정받아야 할 문제를 숨기려고 했던 거잖아.”




그의 단호한 말에 눈물이 고였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정말 정상 같아 보인다...”


그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 멋진 사람이야. 그리고 숨길 필요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는 일이야.”


그의 목소리는 단단하면서도 따뜻했다.

마치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숨겨야만 했던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며 가슴이 조여왔지만, 그의 말이 그것들을 하나씩 풀어주고 있었다.


“가족이 아픈 건 걱정할 일이야.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고.”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목소리는 내가 꺼내놓을 용기가 없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들어주고, 그것들을 나에게 돌려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조용히 물었다.

‘혹시 나, 정말로 괜찮은 사람일까?’


어쩌면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내 안에 작은 불씨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불씨는 처음엔 작고 조심스러웠지만,
점점 단단하고 따뜻한 온기를 만들어냈다.


그 온기는 내가 나를 다시 안아줄 용기를 선물했


그날 밤, 처음으로 스스로를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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