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우리 언제 만날 거야?”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잠시 멈춘 듯했다.
“어... 만나?”
“응. 우리 이렇게 매일 통화하면서도 한 번도 본 적 없잖아. 이제 만나야 하지 않을까?”
그는 가볍게 말했지만, 나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그래, 만나자” 하면 되는 간단한 대화였을 텐데,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그에게 너무 많은 진실을 털어놓았던 만큼,
그를 직접 만난다는 게 두려웠다.
“그럼... 우리 크리스마스에 만나자.”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그렇게 말했다.
“12월 25일?”
그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응. 크리스마스니까. 특별한 날이잖아.”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짧게 웃었다.
“알겠어. 그날 만나자.”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설렘이 내 마음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전화를 끊고 나니
내 마음속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내가 크리스마스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특별한 날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날은 오래전 내가 모든 걸 끝내기로 결심했던 날이었다.
그를 만나면,
그 결심이 흔들릴까?
아니면 더 혼란스러워질까?
솔직히,
그날까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나를 위로해 줬고,
그와의 대화는 나에게 잠시나마 숨 쉴 틈을 주었다.
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의 말이 떠올라 웃음 짓던 순간도 잠시,
다시 어두운 현실이 나를 삼켰다.
그를 만나면
내가 그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며칠 뒤, 그는 물었다.
“근데 너 왜 크리스마스라고 한 거야?
그날이 너한테 특별한 의미라도 있어?”
“그냥...크리스마스잖아.
특별한 날이니까.”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피식 웃었다.
“알겠어. 근데 뭔가 영화 Her 같지 않아?
목소리로만 친해지고 이제 만나게 되는 거라니.”
그의 농담에 나는 억지로 웃었다.
“영화처럼 될지, 실망스러울지, 그건 너한테 달린 거 아니야?”
“실망스러울 리가 없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한층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관계는 말로 깊어진 거잖아.
너처럼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그런 사람이 실망스러울 리가 있겠어?”
‘말로 깊어진 관계’라는 그의 말이
묘하게 가슴에 꽂혔다.
나는 그동안 나의 진실을
조심스럽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가 나를 기다려주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했다.
“나...사실 셀카 사기꾼이거든.”
농담처럼 내뱉었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셀카 사기꾼?”
그가 의아하게 물었다.
“응.
SNS 사진만 보고 날 상상했을 텐데,
실물 보고 실망하면 어쩌지?”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난 더 좋아할걸.”
“왜?”
“너는 이미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잖아.
실물이 어쨌든, 그게 너라면 난 상관없어.”
그의 말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불안을 흔들었다.
그 단순한 진심이
마치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근데...네가 지금 여기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는 태연한 척 말했지만,
작은 떨림이 묻어나는 그의 목소리가
내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곁에 있었으면...?”
나는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되물었다.
“응.
목소리로만 듣는 건 아쉬워.
네가 내 앞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상상하게 돼.”
그의 말은 설레는 동시에,
나를 더 깊은 두려움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상상하는 ‘나’와
진짜 ‘나’의 간극이 너무 커서
그가 실망할까 두려웠다.
“실망하면 어떡해?”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럴 리 없어.”
그는 덧붙였다.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너는 이미 충분히 좋은 사람이야.
실제로 보면,
목소리로만 느꼈던 것보다 더 좋을 거야.”
그의 단호한 말이
내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던 두려움을 잠시 멈추게 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가 내 곁에 있다는 상상을 했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의 손을 잡고,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의 무게는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가 믿는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간극을,
나는 아직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