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와 소박한 해탈 사이, 그 어딘가에서 #18

길랭바레증후군, 열여덟 번째 이야기

by 밍밍한 밍

○ 2022년 11월 넷째 주


아주대학교병원에 근전도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

아주대학교병원 입원 당시 두 번 받아봤던 검사였지만, 근전도검사 시 들어오는 전기자극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검사 병상에 누워 특정 부위에 전기 패드를 붙이고 전기 자극을 준다.

따끔따끔.

이번에도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꽉 깨물어보지만, 새어 나오는 윽 소리를 어쩔 수 없다.


"괜찮으세요?"

"네, ㄱ.. 괜찮습니다."

"못 참겠다 싶으면 말씀하세요. 잠시 쉬었다 해도 괜찮아요."

"네, 알겠습니다."


쉬었다 해봐야 고통에 대한 공포만 커질 뿐..

한 번에 쭉 받고 빨리 마무리 짓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다시금 어금니에 힘을 쥐어본다.

이거 몇 번 더 받았다간 치과에 가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검사 중 한 가지 개선점이 생겼다.

근전도검사 항목 중 발목 부위 근력을 검사하는 파트가 있다.

아주대학교병원 입원 당시엔 발목에 아예 힘이 들어가질 않아 근력 측정이 불가능했으나, 이번 검사땐 미세하게나마 측정을 할 수 있었다.

크게 유의미한 결괏값을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래도 null 보단 낫겠지 뭐.

결과는 다음 외래 때 확인하기로.




"선생님 저 계단 올라가 볼 수 있을까요?"
"어 물론이죠! 그럼 같이 가볼까요? 몇 층까지 올라가 볼까요?"
"9층까지 가보죠. 주말에 봉 잡고 어찌어찌 올라가긴 하거든요."
"오 좋아요 밍님. 뒤에서 제가 받쳐드릴게요. 팔에 힘 빼셔야 해요."


치료사의 말과는 달리, 팔에 힘이 안 들어갈 리 있을쏘냐.
왼쪽 허벅지가 축이 되어 올라갈 땐 팔에 힘이 덜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나, 오른쪽 허벅지가 축이 되어 올라갈 땐 팔이며, 상체며 온몸에 힘이 빠짝 빠짝 들어간다.

"하 힘드네요."
"오! 그래도 지난번에 계단 오르셨을 때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그때 비해서 팔 힘도 덜 들어가구요."
"다 훌륭하신 치료사 선생님 덕분입니다."
"에헤~ 알죠알죠."


지난번엔 깔끔하게 포기했던 내려오는 계단도 한 발자국 내디뎌본다.
내려오는 건 양 발 관계없이 상체에 힘이 90 정도 쓰이는 것 같다.
힘없이 툭 떨어지는 발목과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며 바들바들 떨리는 팔.

"밍님 내려가는 건 아직 무리인 거 같으니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요."
"그게 좋을 것.. 같죠?"
"네. 이렇게 내려가면 무릎에 무리 많이 가서 나중에 관절 아파요."
"역시 훌륭하신 선생님. 넵 알겠습니다."


다른 시간엔 여전히 이어지는 발목운동.


"밍님 발목운동에 약간 변형을 줘봤어요."

"엥? 변형이요?"

"네. 맨 벽에 대고 하니 발바닥 마찰도 크게 적용될 거 같아서, 수건을 깔고 해 보려구요."

"오~ 수건으로 마찰을 최소화하려는 것일까요?"

"오~ 네 맞아요. 그럼 좀 더 수월하게 발목을 움직이실 수 있을 거 같아요."


벽에 수건을 하나 댄 채 이어지는 발목운동.


"선생님. 수월하지 않은 거 같아요..."

"그래도 지난번보다 가동범위가 더 나오는데요?"

"정말요? 흠..."

"제가 직접 보는데 달라요. 조금 더 좋아졌어요."

"오. 역시 훌륭하신 치료사 선생님 덕분입니다."
"당연하죠. 자 발목 길어지게~"


발목운동을 할 적마다 느껴지지만, 허벅지를 불태울 때와는 다른 힘듦이 찾아온다.

생각대로 발목이 움직여주질 않으니 답답함은 배로 커져가는 반면,

힘은 힘대로 들어가서 얼굴은 시뻘게지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거기에 흐르기 시작하는 땀은 덤.

혈압 오르는 소리 들린다~~~~


"밍님 발목 돌릴 때 엄지가 뜨면 안 돼요."


오른발은 얼추 엄지가 눌리는 거 같은데..

왼쪽은 붕 떠버린다. 왼쪽발가락은 정신을 못 차리네.




"밍님 SCI FIT 돌릴 때 세라밴드 채우고 돌리면 더 좋아요."

"아 그렇게 해도 돼요?"

"그럼요. 같은 강도여도 밴드를 팽팽하게 유지시켜야 하기 때문에 더 자극이 잘 올 거예요. 그렇게 돌리는 분도 많이 계셨어요."

"오 감사합니다. 가지고 있는 세라밴드로 해볼게요."


그렇게 세라밴드를 허벅지게 감은 채 SCI FIT를 돌려본다.

돌리는데 필요한 힘이 확연히 는다. 밴드를 너무 세게 조이면 얼마 돌릴 수 없기 때문에 그 중간점을 잘 찾아야 하더라.

허벅지도 허벅지지만 골반쪽에 느낌이 좀 다르게 오는 거 같기도 하다.

더불어 현재 돌리고 있는 SCI FIT의 강도 역시 점차 오르고 있다.

강도레벨 20이 맥시멈인 기기의 첫 시작은 12였다.

12도 낑낑거리며 돌리다 점차 조금씩 강도를 올리기 시작했고, 현재는 최고 강도인 20으로 둔 채 25분 내내 기구를 돌리고 있다.

끝내고 나면 다리에 힘이 없어 파들파들 떨려온다.




점심 급식으로 나오는 두유를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한 가지 묘안이 떠오른다.

낮에 옥상 가서 햇볕 쬐면서 먹자!

그렇게 쪼르르 옥상으로 달려가 몸을 난간에 걸친 채 두유를 한 모금 쪽 마신다.

흠.. 그냥 그렇군.

그러다 포장지를 바라보며 이상함을 감지한다.

콩..두유..? 뭐야 중복표현이네.

KakaoTalk_20230515_094601932.jpg 햇살을 받으며 먹는 두유. 중복표현이 자꾸 눈에 밟힌다.


낮엔 옥상에서 혼자 청승 떨며 두유를 마시고, 저녁엔 로비 TV로 월드컵을 본다.

월드컵을 밖에서 볼 줄 알았지만, 마주한 현실은 병원 로비였다.

로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경기를 보는데, 다른 나라 경기할 땐 역시나 안 보이던 사람들이 우리나라 경기땐 속속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그 사이엔 역시나.


"저 OO 저거 볼 처리를 저렇게 하면 어떡해!"


^^....

그냥 잠자코 경기를 본다. 귓가에 거슬리는 욕설은.. 감안해야지 후.

엮여봐야 좋을 게 없다.


KakaoTalk_20230515_094538955.jpg 다른 나라 경기는 오히려 조용히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새로운 책을 공수받았다. 아니 책이라기보단 문제집이 맞는 표현이겠군.

필요한 게 없냐는 친구의 말에 물리문제가 풀고 싶다고 했던 때가 있었다.


"?? 진짜? 진짜 물리1 문제집?"

"응. 진짜."


때마침 물리1 문제집을 보내준 친구.

와 정말 신나는걸?

받자마자 첫 단원을 풀어본다. 그래 이거지. 내가 찾던 즐거움이지!!!!!


병실 라운딩하던 간호사 선생님이 물리문제 푸는 날 본다.


"밍님 공부하시는 거예요?"

"아뇨아뇨. 공부는 아니구요, 그냥 심심해서 푸는 거예요."

"네? 심심해서 풀어요..??"
"네네! 이거 얼마나 재밌는데요."
"하하 화이팅!"


아 근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네.


"친구야 자존심 상한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러니?"

"물리1 문제집 푸는데 너무 오래 걸려."

"ㅋㅋㅋㅋㅋㅋ 너무 오랜만에 풀어서 그런 거 아냐?"

"아니 그래도 전공이 있는데 하... 자존심 상하네."

"그래도 답은 맞춰봤니?"

"당연히 답은 다 맞지."

"그럼 그거로 다행인 셈 치자."

"하 문제마저 틀렸으면 진짜.."


그리고 다시 봉인된 책. 찰나의 기쁨이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래서 언젠간 풀겠지?

KakaoTalk_20230515_094538955_02.jpg 3점짜리 문제를 푸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재활병원에 입원한 지 어느덧 세 달의 시간이 꽉꽉 채워 흘러간다.

처음 재활병원으로 들어왔을 땐 두 가지의 기분이 교차했다.

하나는 아.. 결국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재활병원으로 들어왔구나 하는 절망감.

또 하나는 그래도 금방 좋아져 일상생활을 다시 영위할 수 있을 거란 희망.

아이러니하게도 후자에 대한 갈망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전자의 것이 더욱 커져만 가더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점차 초조해져만 갔다.

퇴원해야 하는데.. 출근해야 하는데.. 자료 만들러 가야 되는데.. 교육하러 가야 하는데..

하지만 정작 바뀌는 건 없었다.

난 병상 위의 환자였고 재활을 받으러 가야 하는 처지.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건 없었다. 애써 주어진 것을 부정하려는 나의 절망감만 커져갈 뿐.


어느 시점부터 희망이란 것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현실의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한 셈.

난 병상 위의 환자이고 재활을 받아야 하는 입장.

항상 내 주변을 휘감던 절망감은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병원생활에 차츰 스며들었고, 초조해하던 마음마저 사라졌다.


그렇다고 멘탈 텐션이 나락을 향해 가는 날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순간이 왔을 때, 이젠 어느 정도 유연하게 넘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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