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에 약 1년간 미국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인 데다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나라에 갔으니 나는 자연히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도 점차 그들의 문화에 스며들었다. 한국에 비하면 그곳 사람들은 지나치리만치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물론 열심히 꾸미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쩌면 너무) 편한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종종 "너 티셔츠 예쁘다."라는 식의 칭찬을 할 뿐 남의 행색에 과도한 관심을 쏟거나 차림새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꾸미지 않고 편하게만 다닌 것은 아니다. 당시 나는 옷을 잘 입는 데 흥미가 있었고, 그래서 칭찬을 들으면 들었지 무례한 지적을 들을 일은 없었던 그 환경에서 더욱 과감하고 자유롭게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할 수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부끄러워서 입지 못했을 민소매를 입기도 하고, 지금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법한 현란한 무늬의 후드집업을 입고 trick or treat을 하러 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사복이 허용되는 토요일에 미국에서 샀던 상의를 입고 학교에 가자 대번에 약간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는 시선들과 맞닥뜨렸다. 그렇게 내 옷차림은 빠르게 다시 한국화되었다.
어쩌면 옷차림은 타인의 시선에 영향을 받는 여러 영역 중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영역인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중추적인 문제는 삶의 태도와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철저히 개인의 자유에 해당하는 영역에서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말과 행동, 선택을 할 때 타인의 시선과 지적, 간섭이 끼어들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크든 작든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는다. 내게 필요한 조언과 쓸데없는 참견을 구별하고 불필요한 영향력을 잘 떨쳐낼 수 있다면야 괜찮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타인의 작은 움직임에도 영향을 크게 받는 쪽에 속했다. 중학교 때 시험을 잘 봐서 기분이 좋았던 어느 날, 친구와 대화하던 중 "너 잘난 척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들었다. 내 기분이 들떴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당시 내 행동이 잘난 척하는 것으로 비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 후로는 절대 잘난 척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또 하루는 영어 듣기 평가를 치른 뒤 쉬는 시간이었다. 별로 친하지 않았던 한 친구가 다가와 나더러 답을 맞춰 보자고 했다. 시험 결과에 자신이 없었고 갑자기 다가온 친구가 부담스러웠던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자 친구는 "아, 너 영어 못해?"라고 하더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후 듣기 평가 성적이 나오고 어쩌다 내 성적을 알게 된 그 친구는 "야, 얘 하나 틀렸으면서 영어 못한대!"라며 반 아이들 앞에서 어이없다는 듯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나는 정말 내 실력에 자신이 없어서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그 친구의 말 한마디에 '잘하면서 못한다고 하는 재수 없는 애'가 되었고 괜히 죄지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국 잘한다고 해도 문제, 못한다고 해도 문제였던 셈이다. 이후 나는 무언가를 잘한다고 말하지도, 못한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말을 아끼게 되었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였다. 남이 책 읽는 모습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있지만 아니꼽게 바라보거나 유별나게 생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또래들이 있는 공간에서 대다수의 행보와 달리 혼자 책을 보고 있으면 문제가 된다. 고등학생 때, 시험이 끝난 뒤에 찾아온 체육대회 날이었다. 학생들 대다수는 운동 경기에 참여하거나 응원하면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참여하는 종목도 몇 개 없었고 경기를 보거나 응원하는 데도 그다지 흥미가 없어서 운동장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때우는 대신 평소보다 한산한 교실에 들어와 앉았다. 나처럼 교실에서 쉬려고 들어와 있는 친구들도 몇 있었다. 체육대회 날답게 날씨도 선선했고 교실에도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나는 가져온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대번에 주변에서 "야, 너 공부해?!"라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해명 아닌 해명을 했지만, 그런 반응을 겪고 나니 더는 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남들 다 놀 때 혼자 공부하는 별난 애', 혹은 '잘난 척하는 애'로 보일까 봐 신경이 쓰였던 탓이다. 그래서 이후로 지인들 앞에서는 책을 읽기 어려워졌다. 누가 뭐라고 해서라기보다는 내가 남들 눈을 신경 쓰느라 어차피 집중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과민 반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시답잖은 걱정을 완전히 떨쳐내지도 못했고, 이리저리 분산된 집중력을 되찾아오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나중에 가서는 외부에서 오는 타인의 시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나의 시선이 더욱 문제가 되고 말았다.
나와 남 모두를 너그러운 시선으로 보는 연습
우리나라는 유독 평균, 표준, 유행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현대사회는 다양성과 개인의 자유를 외치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여전히 다양성이나 개인의 자유가 존중받지 못할 때가 많다. 나는 어릴 때에 비하면 지금은 남들의 시선에 구애를 덜 받지만 아직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 더 많다. 어쩌면 다시 미국처럼 남의 시선에 신경을 덜 쓰는 문화권으로 가서 살지 않는 이상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또 어쩌면 내가 무심코 던진 시선이나 말 한 마디에 과거의 나처럼 상처 받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지." 마인드를 장착하고 나와 남을 너그럽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