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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연 Apr 15. 2024

물건이 가도 추억은 남는다


  이제 대망의 마지막 정리 품목, '추억의 물건' 순서입니다. 추억의 물건을 가장 마지막에 정리하는 이유는 그만큼 정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들 한 번쯤은 겪어 보셨지요? 오래간만에 정리 해보겠다고 큰맘 먹고 옛날 물건에 손을 댔다가 그만 옛 사진이나 편지를 발견하고는 시간 가는 모르고 한참을 들여다본 경험이요. 보통은 그러다가 해가 지고, 정작 하려던 정리는 반의 반도 끝내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추억의 물건을 정리하기 유독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추억의 물건에는 말 그대로 옛 추억과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물건을 버리면 마치 그 물건에 깃든 추억마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꼭 소중한 '과거의 나'를 잃어버리는 듯한 느낌이지요. '현재의 나'는 분명 지금 이곳에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과거의 나'를 휙 놓아버리기에는 왜인지 두려운 기분이 듭니다.



좋지 않은 추억이 담긴 물건도 생각보다 많다


  그토록 간직하고 싶은 물건이라면 분명 소중한 기억이 담겨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저는 추억의 물건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면서 뜻밖에도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 그다지 소중하지 않거나 오히려 나쁜 기억이 담긴 물건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과거의 저는 조금이라도 추억이 될 만한 것은 죄다 소장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전시회 티켓, 관광지 입장권, 누군가 준 종이학 한 마리, 작은 쪽지, 예쁜 초콜릿 포장 상자, 외국 동전 등 종류도 가지각색이었죠.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숨 쉬고 살아온 나날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이런 물건 역시 어느새 감당하기 힘들 만큼 훅 불어나기 마련입니다. 과거의 조각들을 보며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옛일을 떠올리는 것은 물론 그 나름대로 재미있지만, 그 작고 무수한 순간을 다 간직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에 직면했습니다.


  한편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닌데도 단지 선물 받았다는 이유로 갖고 있던 물건도 많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마음에 없는 편지나 선물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특히 학창 시절에는 롤링페이퍼니 뭐니 해서 학급이나 동아리 내에서 서로 생일을 의무적으로 챙기는 문화가 있어서 그런 경우가 더 잦습니다. 물론 생일을 계기로 평소 친하지 않던 사람에게도 이야기해 볼 기회가 생긴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지만, 마음 없이 형식적으로 쓴 것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편지를 받는 건 생각보다 서글픈 일입니다.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이게 웬 고역인가 싶지요. 심지어 어떤 편지는 억지로 마음을 꾸며내는 것조차 서툴렀는지 추억이 될 만한 말은커녕 은근히 기분 나쁜 말이 쓰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건을 정리하면서 그동안 받은 편지와 쪽지를 하나하나 찬찬히 읽어 보니, 그저 막연한 의무감 때문에 이렇게 상대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고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편지마저 계속 가지고 있는 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리하고 나서야 추억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추억의 물건 정리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물건에 담긴 기억이 소중하니 버리지 않고 전부 간직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물건을 정리했을 때 오히려 잊고 있던 추억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잘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간직'한다는 명목으로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추억의 물건을 가지고만 있을 때는 그 물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어차피 내 손안에 있는 물건이니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간직한다는 미명 하에 사실상 방치하는 셈입니다. 방치는 결코 물건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방치해 두는 사이에 소중한 추억은 빛이 바래고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증발해 버립니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하나하나 차분히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버릴지 남길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저는 정말 소중한 추억은 가슴 깊이 잘 간직하고, 그렇지 않은 추억은 훌훌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이쯤에서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가 추억의 물건 정리에 관해 뭐라고 언급했는지 볼까요?


  "정리는 과거 하나하나에 결말을 내는 행위다."

  "추억의 물건을 정리하는 것은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첫발을 내딛는 ‘정리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다. 우리는 이처럼 물건 하나하나와 마주해 정리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거쳐 현재에 존재하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공간은 과거의 자신이 아닌 미래의 자신을 위해 써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물건 정리는 단지 물리적 실체인 물건을 정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물건에 담긴 과거도 함께 청산하는 작업이지요. 어쩌면 그래서 선뜻 정리하기가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과거를 하나하나 직면하려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그래도 용기 내어 마주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옛 추억을 회상하는 일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역시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것을요.




  이렇게 의류부터 시작해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까지 모든 물건 정리가 끝났습니다. 이제 저는 전보다 한결 단출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몇십 년에 걸쳐 쌓이기만 하고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짐이 없고, 집안에 나도 모르는 내 물건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참 가뿐하게 느껴집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서 여행이든 이사든 언제고 훌쩍 떠날 수 있을 듯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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