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된다는 것- 겨울
한국이나 일본이나, 장마 뒤 찾아온 습도와 더위에 지쳐있는 요즘이다.
특히 일본의 습도는, 집을 나서는 순간 온몸이 젖을 정도이다.
일본살이 7년 차인 나도, 매 년 찾아오는 이곳의 여름이 아직까지 적응되지 않는다.
이럴 때마다 혼자 되뇌는 드라마 대사가 있다.
"지금 기분 잘 기억해 뒀다가 겨울에, 추울 때 다시 써먹자. 잘 충전해 뒀다가, 겨울에"
- '나의 해방일지'中
개인적으로 많이 애정하고, 주기적으로 대사 한 마디 한 마디 소중히 꺼내어보는 드라마 중 하나이다.
이렇게 덥고 지치는 시기엔 저 대사처럼 겨울의 기억, 기분을 써먹으려 한다.
일본에 온 이래, 써도 써도 닳지 않는 겨울의 기억이 있다.
너무 좋아서, 써도 써도 닳지 않는다. 유효기간이 아주 긴 기억이다.
2020년
일본에서 한 해를 보낸, 나름 일본살이 2년 차가 됐을 때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어느덧 일상으로 돌아와 버렸기에, 우리 모두가 가끔 잊으며 살고 있는 그 시절,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이다.
유학 2년 차에 접어든 해부터 집에 돌아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집에 돌아갈 수는 있지만, 한번 가면 일본에 돌아올 수 없다는 대사관 공지가 뜬 거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에겐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집에 가서 앞으로 수개월이 될지 수년이 될지 모르는 기간 동안 온라인 수업을 듣느냐,
일본에 남아 알바도 하고 동기들과 지내며 일본생활을 이어나가느냐.
당연히 후자.
뭘 물어, 여기까지 유학 왔는데 다시 한국 돌아가서 일본어 제대로 늘지도 못한 채로 온라인 수업을 듣는다?
일본 적응하겠다고 한국인 커뮤니티를 일절 단절하고 살고 있는 나에겐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렇게 코로나 시기를 오로지 일본에서, 홀로 보내게 되었다.
처음엔 어차피 학교에서 하고 있는 부활동(미식축구부 매니저)때문에 한국 자주 가지도 못 가는데,
이렇게 못가나 저렇게 못가나 다를 게 없다 생각했다.
나 나름대로, 본가를 나와 일본에서 홀로 생활한 지 1년이 넘었을 때였기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혼자가 되는 건 나에게 식은 죽 먹기라 생각했는데, 아직은 가족이 필요한, 만 스무 살이었다.
집에 안 가는 게 아닌 못 간다는 생각에, 수개월을 우울하게 보냈다.
그렇게 한없이 자기 연민에 빠져있었다.
2020년 12월, 겨울
일본 국내에서는 조금씩, 아주 조심스럽게 국내여행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가장 친한 대학교 동기 두 명과, 당시 '쿠사츠'라는 온천지로 크리스마스 여행을 가게 됐다.
아마 가족 없이 보내는 인생 첫 크리스마스였을 거다.
그 어느 기념일보다 크리스마스를 소중히 보내는 우리 가족은,
매 년 서로의 선물을 비밀리에 사서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두었다가
당일 아침에 모두 트리 밑에 모여 같이 오픈식을 한다.
그런 크리스마스였기에 가족 없이 보내는 크리스마스, 집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크리스마스가
그 어느 날보다 외롭게 다가왔기에, 동기들과의 온천 여행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이브날 밤, 우리는 숙소에 돌아와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고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촛불을 켜며 분위기를 냈다.
그렇게 나는 '아, 이렇게 소중한 친구들이랑 보내는 크리스마스도 참 좋다..'라고 생각을 하던 찰나,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희, 메리 크리스마스~"
언니 목소리였다. 동기의 손에 들린 휴대폰 안의 영상 소리였다.
언니, 엄마, 아빠가 등장하며 차례대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며,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지 못하는 나에게 영상 편지를 보내준 거다.
이 친구들이 어떻게 이 영상을 갖고 있는 건지, 언제 이렇게 준비한 건지,
그런 걸 생각할 새도 없이, 영상을 보자마자 아기처럼 울음이 터졌다.
한참을 울었다.
집의 막내가 크리스마스를 홀로 보낼 거라 생각해 영상을 준비한 가족,
그 영상을 나에게 서프라이즈로 선물하기 위해 언니와 연락해 준비해 준 동기들,
마냥 외로워하다가 영상 받고 아기처럼 울고 있는 나.
너무 고맙고 또 고마우면서도, 왜인지 좀 부끄러웠다.
이렇게 철없는 나이지만 곁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
아주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오래오래, 앞으로의 여름날에도 꺼내어 볼 소중한 겨울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