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 위의 선택
*이 글의 본문은 수정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쉽지도 어렵지도 않아 의 내용을 참조하세요.
정원이는 자폐 스펙트럼 외에 동반질환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아이의 케어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2025년 1월 경기파를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세번째 뇌파검사였습니다. 그간 발견되지 않았던 뾰족한 그래프를 그제야 볼 수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춘기 들어설 때 조심해야 한다던데, 하는 카더라의 확률은 안타깝게도 정원이에겐 해당되지 않았어요. 전신대발작은 2021년 5월, 2022년 7월, 2023년 10월, 그리고 2024년 1월에 겪었습니다. 네 번째의 간격이 짧았기에 작년부터는 소아신경과 진료도 함께 병행하고 있어요. '막연하게 예방하고 관리하면 된다'에서 2024년 1월에 있었던 마지막 전신대발작 이후로 주기적인 진료로 전환되지 1년만이었습니다.
사실 놀라진 않았습니다. 오르필은 두번째 발작 이후 먹기 시작 했고 그 이후로도 두번의 발작이 더 있었으니까요.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습니다. 2021년 첫발작 이후 실시했던 뇌파검사와 달리 아이는 예상보다 협조적이었습니다. 4년의 시간은 저의 마음을 무디게 해주었고 아이도 조금 성숙하게 했습니다.
교수님이 지난 진료에서 컴퓨터 화면의 그래프를 보여주시고, 간헐적으로 발견된 이 뾰족한 선을 전 마주했습니다. 그 순간 아팠어요. 마음이 창에 찔린 듯, 생살이 찢어진 것만 같습니다. 마치 무딘 칼로 상처를 건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뇌전증에 대한 동반질환의 위험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지요. 실제로 정원이는 항경련제인 오르필을 만 6세 이후 초등입학 직전부터 복용하고 있습니다. 소아정신과에서 오프라벨(off-label)로 처방받은 거니까. 그저 낙관적으로 생각했어요. 동반질환의 위험성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나의 현실이 된다는 것은 참 다른 문제였어요.
자폐는 동시에 여러 증상을 동반하는데, 환자의 약 30%가 뇌전증 증상을 보인다. 한편 뇌전증 환자는 일반인보다 자폐증 진단 확률이 약 8배가량 높다. 이는 두 질병이 유전적 메커니즘을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실제로 자폐와 뇌전증은 유전적 변이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원문출처: IBS(r기초과학연구원 홈페이지, 자폐에 동반되는 뇌전증의 원인과 효과적 치료전략 제시)
엄마인 제가 느끼기에 정원이는 조금 달랐습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또래와도 지적 장애를 가진 또래와도, 센터나 학교에서 만난 무수한 아이들을 보면서 결의 차이를 느꼈어요. 그 차이가 정원이가 일반발달이란 뜻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자폐성 장애는 스펙트럼 장애이니까, 그저 우리 아이도 그래프의 귀퉁이에 존재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아이의 고유한 성향이었으니요.
발작이 일년 단위로 있었을 때는 두 눈으로 마주했지만, 그래도 주상병은 아니니 관리만 잘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장 먹고 재우고 의사소통하는 그 모든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그 중요도의 순위가 한참 아래였거든요. 무심히 이상하다고 느낀 차이가 바로 이 부분이었나봅니다. 정원이는 설명되지 않는 컨디션 기복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는 모두가 힘들어졌어요. 적응과정은 올 스톱되고 일상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정원이는 다른 친구들이 쓰는 약물 복용에 신경계 부작용을 만 5세(2021.11~2022.1 리스페달 복용 시), 만 6세(2022. 7-8, 아빌리파이 복용 시)에 두 번 겪었습니다. 정원이는 근긴장이상(dystonia)이란 부작용을 겪었습니다. 근긴장이상증은 비정상적인 근육 수축으로 인해 특정 부위가 과도하게 꼬이거나, 떨리거나, 움직임이 제한되는 신경학적 증상입니다. 소아에게는 주로 다리부터 시작되는데 정원이의 경우는 목 뒤 근육이 수축되는 것으로 도파민의 차단에 의해 발생되었던 거죠. 아빌리파이*와 리스페달*의 기전은 쉽게 설명하면 도파민을 차단하거나 조절하는 것입니다. 정원이의 부작용은 이 도파민 차단에 의한 근긴장이었습니다. 결국 정원이는 복용을 중지하게 됩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부작용 증상을 기록하고 빠르게 대학병원 의료진과 소통하고 단약했던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부작용의 흔적을 최소화 할 수 있었어요. 이후 저는 아이의 증상이 2주 만에 90% 이상 감소한 것을 적어서 다시 내원했습니다. 처방은 의사가 하지만 생활은 엄마와 함께 합니다. 전 매일의 상황을 기록하지만 의학적 판단은 많은 임상과 전문성을 가진 의사의 몫이거든요. 아이의 행동이나 상태 변화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인은 아이도 저도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약물복용 시 아이의 변화를 기록해서 내원하는 것은 향후 처방의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어줄 겁니다.
리스페달과 아빌리파이, 두 약은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동이 복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처방약이었기에 전 안타까웠습니다. 아이의 발달과 생활의 안정을 돕기 위해서는 다방면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삶의 질의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약물복용도 재활치료만큼 저에겐 중요했지요. 실제로 주변에서 해당 약을 수면을 돕고 조절을 도와서 발달을 이룬 친구를 본 적도 있거든요. 같은 '기적'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모든 아이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원이에게 부작용을 남긴 이 두 약은 사춘기 지나서 다시 도전해 보자고 유보된 상태입니다. 어떻게든 정원이의 수면과 감각을 돕기 위해서 다른 약을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경련을 했다는 이력은 약물처방에 매우 큰 제한을 주었습니다. ADHD 관련 약은 쓰지 말자고 교수님들이 입을 모아 말씀 주셨거든요.
매해 겨울, 한 해의 시작에 아이가 참 많이 아픈 달이었습니다. 2025년 1월에는 먹지 않는 2주가 지속되었어요. 2024년 2월에는 6주 동안 아이가 절뚝이며 제대로 걷지 못했어요. 크느라 아픈지, 아프고 나니 크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는 이 고된 시간을 겪어내면 또 아주 조금 미세하게 자랍니다. 성장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그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몹시 괴롭습니다. 약물 복용이란 선택이 아이를 괴롭게 하는 것일까 스스로 묻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결국 한 땀 한 땀 재활에 매진하면서 부작용을 겪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세 번째로 선택한 약이 항경련제인 오르필이었어요. 첫 번째와 두 번째 뇌파에서는 경기파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아이에겐 필요하다고 생각돼서 소아정신과 교수님께 문의해서 처방받았거든요.
신경과 교수님은 경기파보다는 발현되는 증상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복용하길 잘 했다 하셨어요. 아, 복용과 부작용 그리고 성장의 변곡점을 계속 겪으면서 오르필에 도전했던 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나 봅니다. 복용 이후 천장의 불빛을 보는 시각의 추구가 많이 줄고 제 눈을 마주하게 되었거든요. 정말 다행이지요. 눈을 마주 하면서 조금이나마 더 배울 수 있었고 성장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도전의 여정은 의미 있습니다. 비록 뇌파검사에서 경기파가 나왔을지언정 제 손은 빈손이 아니니까요. 아이에게 미리 우산을 씌어줄 수 있었다는 마음에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비로소 아픈 아이에 대한 마음의 묵은 상처, 자책감을 봉합해 봅니다.
물론 앞으로의 여정도 뜻밖의 일들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면 후회는 없겠지요. 그 흔들림에 무너지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래서 이번 뇌파검사 결과를 마주해도 울지 않을, 내면의 단단함을 저는 얻을 수 있었습니다.
브런치북 <자폐를 가진 정원이의 세계> 1부는 변방의 언어로 머물던 ‘장애’가 아니라, 보통의 아이 정원이가 가진 자폐를 이야기합니다. 2부는 ‘서포트 리포토 for 정원이’로 직접 활용했던 리포트를 통한 구체적인 사례를 기록합니다. 이어서 행정학자인 엄마의 시선으로 정책의 틈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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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인생정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