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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아, 준비됐니?

특수학교로 전학하다

by 인생정원사


정원이는 매 순간 크고 있고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폭은 매우 미세해서 따라잡을 수 없죠. 눈을 크게 부릅뜨고 쫓아 달리는 기분이기도 합니다. 매순간 앞만 보고 달리느라 손을 잡고 있는 '지금의 정원이'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하는 2년 반의 초등학교 생활은 정말 숨이 가빴어요. 하루하루 무탈하게 살아남는 것을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학교에서는 성공하고 싶었어요. 보란 듯이요. 이를 위해 정말 온 힘을 다했었죠. 결국 2년간 정원이도 저도 잘 해냈어요.

성공한 하루를 위해 고군분투는 매일 계속되었어요. 그 생존의 틈에서 결국 저는 아이의 희로애락을 놓쳐버렸습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조금씩 틈이 벌어졌더군요. 온 마음을 다한 헌신으로 조정하고 살피다 도리어 제 손의 무게만 늘렸어요. 제 손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지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맞지 않은 틈을 조금이라도 메꾸면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성장을 어렵게 했습니다. 세상은 기대와 달랐어요. 노력하면 그릇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내 몫의 그릇이 늘어날 뿐이죠. 학교는 아주 조금씩 소극적으로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제가 이제 더 이상 메꾸기가 버겁다 느꼈을 때는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누구든 한 발 더 내딛는 것은 어려우니까요.


고백합니다.

저는 실패했어요. 수정하고 다시 복구할 에너지가 남지 않았습니다.


올 봄에 정원이가 많이 아팠습니다.

아픈 아이를 케어하는 것은 별도의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어요. 새롭게 맞이한 3학년이란 무게는 정말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2년 간 나름 애쓰고 잘 적응해 온 정원이에 대한 기대가 아이의 어깨를 더 무겁게 했어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낙관적으로 잘 될거라며, 느긋하게만 생각해 온 제 탓을 했죠. 정원이는 계속 소변실수를 하기도 했습니다. 소변실수가 나아지면 귀를 틀어막고 버티기를 했지요. 그러다 기분이 좋아져 며칠 잘 등교하고 나면 배앓이로 1~2주 결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장기결석이 몇 차례 반복됐고 등교하면 적응의 과정부터 시작해야 했죠. 그래도 2년간 함께 노력했으니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지요. 되풀이 되는 이 지난한 적응-배앓이-버티기-소변 루틴이 반복될 수록 다 함께 지쳐갔던 것 같아요.

1학년때 조금씩 기다려줬던 어른들은 위험하단 이유로 기다려주지 못했습니다. 급식실에서 여자 어른 넷이 정원이의 팔다리를 잡고 이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득했죠. 30킬로의 정원이가 사지가 들린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선명했고 낯설었어요. 그 과정에서 어른들이 팔을 긁혔다는 이야기에 전 사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우 울지 않고 등교한 날 정원이는 긁는 행동이 발생했습니다. 사실 상황 자체는 지난 2년간 있었던 일과 큰 차이가 없었지요. 이 행동을 줄이고 다치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했어요. 누군가 다치는 상황은 정말 반갑지 않았죠. 큰 문제가 아니니 상황이 커지면 그때 전문가 회의를 해보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 저는 문제가 더 커지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정원이가 겪을 문제니까요. 이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니 조금이라도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랬어요. 아이가 2년간 많이 커준 고마운 곳이니 더 붙잡고 싶었습니다. 아이가, 아이가 더 클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죠.

'바지를 더럽혔을 때는 가서 닦아주고 갈아입혔었는데, 차라리 급식실에서 다 보는 곳에서 들지 말고 나를 부르지.'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찬물을 뒤집어쓰는 것처럼 정신을 차렸습니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모든 문제를 제가 해결할 순 없었습니다. 이 이상 제가 학교 안에서 뭘 할 순 없었지요. 이 틈이 제 눈 앞에 가시화되었을때는 많은 것이 어긋나서 고착화된 후였어요.

아, 처음부터 저는 무리한 욕심을 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평소에는 충분히 견뎌낼 상황이었는데 수술 직후라 약해진 몸 때문에 더 나약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발달이 느려도 느린 대로 한 동네에서 같이 등교하고 동네에서 정원이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그런 보통의 삶이 이제 허락되지 않았어요. 그제야 알았어요. 제가 꾼 꿈은 똑같은 속도로 자라지 않아도 괜찮은 곳이었죠. 삶의 속도와 형태는 달라도 함께 동행할 수 있음을 꿈꾸었어요. 다르기 때문에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을 때 아프게 와닿았어요. 그러나 정원이를 붙들고 있는 손이 아무리 버거워도 놓을 수 없었어요. 엄마잖아요.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어요. 2년간 아이도 자랐지만 친구들은 훨씬 더 자란게 보였죠. 교과목은 무척 어려워졌지요. 아이는 특수학급에 '알맞게' 성장하지 못했어요. 아이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선생님도 애쓰셨던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누구 한 명이 애쓰는 구조는 더 이상 아니라고 생각만 들었어요. 더이상 충분한 에너지가 없었던 것 같아요. 조금 더 늦게 판단하면 선택의 기회조차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글쓰기를 멈추고 움직였습니다.

'정원아, 준비됐니? 한 번도 제대로 물은 적이 없네. 엄마랑 새로운 도전을 할 준비가 됐니.'

잠든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저는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이게 도망이 아니란 걸, 엄마도 믿고 싶어. 두 번째 전학일테니. 첫 번째는 특수학급에서 특수학급이었잖아? 그때는 물어볼 틈 조차 없었어.'

그때쯤일 거예요. 정원이 등교를 하려면 덜컥, 마음이 내려앉았어요.

'이번엔 특수학급에서 특수학교로. 괜찮겠지? 전혀 다른 낯선 곳으로 가는 거라 걱정이긴 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는데 제 발걸음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 무엇도 우린 알 수 없단다. 여기도 좋은 환경 찾아왔고 잘 적응했지만 결국 선택해야 하니까.'

2주간 아이 아빠가 저 대신 아이의 등교를 해주었습니다.

'아, 엄마도 쉽지가 않구나. 어디든 마찬가질까? 겁이 나. 정원아, 엄마가 약한 걸까?'

지난한 과정 끝에 아이는 조금씩 원래의 컨디션을 회복했어요.

'너는 올해 유달리 아플 정도로 견디는데. 어찌해야 할지,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야. 마음만 정해놓고, 변화가 두려워서.'

그때는 이미 여름방학이 3주밖에 남지 않았지요.

'아가,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계속 고민했어요.

'조금만 더, 견뎌볼까?'

나의 두려움을 극복하면 될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전학한다고 해서 만능해결키가 쥐어지는 게 아닌 것은 이미 겪었으니까요. 집에서 걸어서 3분이 참 멀게도 느껴졌습니다. 조금씩 빈 자리를 알아보았어요. 무력함에 눌려 움직일 시기를 놓치면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기약 없이 늘어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늘 자리는 모자라거든요. 2학기에 예정된 현장체험학습에도 활동지원사가 9시부터 따라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조마조마하는 가을이 눈에 그려졌습니다. 인근 특수학교들의 가까운 곳부터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곳부터 빈자리를 알아보고 대기번호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또 아주 멀지도 않은 이웃도시의 학교에 빈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운 좋게 3개 반이 되어서 자리가 생긴 것이었죠. 때마침 빈 집도 있어서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시기에 맞는 선택을 한 것이라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도움반 선생님은 이번 주 들어 적응하고 있는데 이사가게 되어 아쉽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가장 좋은 컨디션일 때 선택했지요. 노력한 게 아까워 미련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학을 위한 마지막 개별화 회의 때 세분의 선생님을 마주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저는 견딜 만큼 견디다 도망치듯 학교를 옮기고 싶지 않아요. 가장 좋을 때, 자신에게 알맞은 곳으로 간다고 정원이에게 이야기해 줬어요. 도망이나 실패가 아닌 선택이라고 여기게끔요. 벌써 두 번째 전학이니까요. 그동안 애써주셔서 아이가 많이 자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원의 발달에 비해 어려워진 교과과정의 갭을 아이는 견딜 수 밖에 없었죠. 그 과정에서 아이가 힘들다는 것은 모두가 이견이 없었습니다. 물론 학습적인 것을 따라갈 수 없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면 괜찮았습니다. 학교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면 되었으니까요. 저는 정원이가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을 저는 원했지요.

‘정원아, 복지관 수영장처럼 친구 많은 곳으로 가자, 재밌지 않을까?"

아이가 덜 아프게,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지내길 소망했습니다. 미리 학교 앞에도 가보고 방학 동안 가는 길도 익혔어요. 출근길 30분이 이제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지요. 처음으로 세 가족이 둘로 분리되어 아이와 저만 전입신고를 하고 작은 단칸 집을 보았을 때도 덤덤하더라고요. 2년 전처럼 한꺼번에 모든 변화가 아니라 조금씩 느리게 적응하기로 했거든요. 큰 짐을 갖고 하는 이사도 천천히. 모두를 위해서죠.


두 번째 등교일, 마침 언어재활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아이에게 AAC(마이토키)로 물었어요.

"학교 좋니?"

[네]

"학교 첫날 어땠어?"

[낯설어]

"오늘 어땠어?"

[궁금해]

"내일 어떨 것 같아?"

[기대돼]

엄마랑 아침마다 멀리 타고 가는 거 괜찮아?

[좋아]


모든 그림은 챗지피티와 함께 그렸습니다.


물론 마지막 1%는 제가 학교랑 더 소통했으면 나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아 있습니다. 정말 애썼으니까요. 이것은 어른의 미련일지도 모르지요. 전학 이후의 삶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느긋하지 않게 할 일은 휘몰아쳤습니다. 상황을 찬찬히 바라보고 싶었지만 또 아이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만 했죠. 달라진 점은 매 순간 웃는 낯으로 아이가 등교하지 않아도 마음이 놓입니다. 아직 아이는 적응과정에 있지만 저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밤 역시 정원이가 제 옆에 잠들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종일 먹이고 씻기고 눈으로 좇느라 미처 보지 못한 예쁨을 그제야 알아차립니다. 고된 일상이란 핑계로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찬찬히 들여다보지 못해서 미안한 밤입니다.

저는 더 느리게 그리고 깊이 가기 위해 전학했단 것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2년 간의 시간은 실패도 성공도 아니었어요. 정원이와 함께 모두가 애써왔던 시간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분주한 삶에 쫓겨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요. 정원이는 분명 알아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이 든 아이의 볼에 입 맞추고 가만히 속삭입니다.

"사랑해, 정원아."



브런치북 <자폐를 가진 정원이의 세계> 1부는 변방의 언어로 머물던 ‘장애’가 아니라, 보통의 아이 정원이가 가진 자폐를 이야기합니다. 2부는 ‘서포트 리포토 for 정원이’로 직접 활용했던 리포트를 통한 구체적인 사례를 기록합니다. 이어서 행정학자인 엄마의 시선으로 정책의 틈을 이야기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asd-papers






브런치북 연재가 멈추었던 이유를 이제야 고백합니다. 두 달 반의 퇴고도 바빴지만, 이 과정을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담담히 쓰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어요. 지금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이 순간의 선택임을 받아들였으니까요. 한결 마음이 놓여요. 전 이곳에서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끝내 열심히 해버리고마는 저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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