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Poco a poco) 천천히(Largo) 느리게(Adagio)
느린 아이를 키우다 보면 수많은 유혹을 만납니다. 바로 발달을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다는 거죠. 빠르지 않아도 지금보다 나아진다는 것이 솔깃해집니다. 그 모습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정원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어요.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재활치료를 받으면서도 여러 가지 제안을 받았죠.
"언니, 제가 이 영양제를 먹이니 애 인지가 좋아진 거 같아요. 먹여볼래요?"
"위층 언니가 그러던데, 정수기 물을 바꾸면 뇌가 건강해진다더라."
"이 책 읽어주면 말하기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사모님, 한 질 들이시죠."
"탄수화물을 다 끊어봐요. 정원이는 경기가 있으니 케톤식이가 필요한 거 아녀요?"
"미국 가서 무슨 뇌파 전기자극치료받으면 좋아진다더라. 한국에서도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할 수 있대."
"꽉 껴안아 주세요. 신체접촉이 아이를 정서를 안정시켜 줘요."
"아이를 재우려면 매일 두세 시간 산을 오르거나 계단을 오르세요. 하루라도 빠지면 안돼요. “
세상은 빠른 비법을 자꾸 공유합니다. 느리면 안 되니 어떻게든 해결방법을 찾으라고 조언해 주죠.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순 없습니다.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저에겐 이유가 있지요.
정원이는 중도복합장애를 갖고 있어요. 중증의 자폐 스펙트럼이 주장애이고 뇌전증이 동반질환이에요. 아주 섬세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섬세하단 것은 과보호랑은 다릅니다. 가르치는 것도 환경의 변화를 주는 것도 느리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것을 의미하죠.
뇌파의 변화로 인하여 컨디션의 변화가 있어도 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아이의 스트레스와 정서관리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제 모습이 답답해 보일지 모릅니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빠르게, 정확하게, 폭풍처럼 좋아지는 방법들을 알려줍니다. 그 방법이 결코 쉽지 않아요.
한번 속이 거북하면 10일간 곡기를 끊는 아이에게 탄수화물을 제한하기란 무서운 일입니다. 아직 알약도 먹기 어려워하는 정원이에게 영양제를 많이 먹일 수 없었죠. 정원이의 경우 2024년 1월 이후 가시적인 전신발작은 아직 없었습니다. 항경련제인 오르필을 먹으면서 안정적인 관리에 힘써왔죠. 탄수화물을 끊거나 임의대로 영양제를 과용했을 때 아이의 뇌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병원의 검사와 의사처방이 아니고 임의대로 할 수 없죠. 갑자기 경기가 일상화된다면, 멀리 학교를 다니고 공원에서 놀고, 센터에서 언어치료를 하는 그 모든 생활이 정지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어요. 물론 지금이 워낙 느리고 힘겨우니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뜻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희미한 가능성 때문에 지금의 안정적인 일상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느리지만 정원이는 아주 조금씩 크고 있거든요. 뇌에 전기자극을 주는 치료나 ADHD 약물은 시도할 마음조차 먹지 않았어요. (대학병원 교수님들도 꼭 당부하시죠.)
그러나 때로는 그런 ‘하지 않는’ 선택이 부모로서 용기가 없거나 노력하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새로운 것을 더 시도하면 뭔가 더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자괴감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정원이는 정말 섬세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정원이는 두 돌 때부터 지금까지 언어치료를 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발화 아동입니다. 그렇다면 언어치료가 소용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아래는 작년 5월의 수용어휘력 평가입니다.
- 검사시간: 34분 동안 의자에 착석해 수용어휘력 검사 수행 후 이탈(1분 쉬고 자리 바꿔 수행)
- 검사태도: 검사자극 그림 중 아동에게 두드러지는 자극을 제시어를 듣기 전에 포인팅 하는 행동이 관찰됨. 검사자극에 주의를 기울이고 제시어를 듣고 가리키도록 물리적인 보조(치료사가 아동이 제시어를 듣고 검지를 뻗어 반응할 수 있도록 기다리기 및 반응개시를 가볍게 촉진) 치료사가 들려주는 제시어를 듣고 대체로 그림을 차분하게 본 뒤 반응. 일부 문항은 스스로 수정하기도 하고, 자신 있는 항목은 매우 빠르게 반응하였으며 어려운 항목은 천천히 고민후 반응.
- 공식절차에 따라 검사를 진행하였으나 검사자극을 고루 보고 제시어를 듣고 반응하도록 하는 안내는 충분히 제공함.
- 수용어휘력 원점수 69점, 수용등가연령 83개월(6세 6~11개월), 또래와 비교할 때 백분위 10% ile미만, -1SD~-2SD사이(7세 후반 평균 86.47 표준편차 9.14)
정반응:
던지다, 무릎, 구르다, 뱉다, 윷, 농부, 실망하다, 외투, 철봉, 숲, 집배원, 소곤거리다, 환자, 심다, 책상, 세면대, 전등불, 설계사, 부화하다, 가축, 각도기, 추수하다, 한쌍, 방충망, 버드나무, 부축하다, 확대하다, 뿌리, 식료품 등
오반응:
동/형용사-설거지하다, 겨루다, 엿보다, 협동하다, 위급하다, 해부하다, 굽이치다, 토론하다, 침몰하다, 늠름하다, 철거하다, 시위하다, 마르다 등
명사/수사: 넥타이, 풀, 팔꿈치, 삽, 기둥, 곡식, 궁궐, 만국기, 석수, 탄광, 자매, 도표, 비석, 대여섯 등
제가 가졌던 단 하나의 믿음은 정원이가 많은 것을 알아듣는다는 것이었어요. 표현이 어려워도, 듣고 행동하는 게 느려도 알아듣는다는 느낌이 있었죠. 그것을 확인하니 무척 기뻤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3화에서 말씀드린 대로, 정원이는 무척 섬세하고 점진적인 접근이 필요해요. (감각이 예민하고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이지요.) 그 템포를 늦추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꾸준히 지켜보고 미세하게 조정해야 해요. 아주 조금씩 섬세하게요.
삶이 음악이라면 저는 정원이와 함께 천천히 걸을 겁니다. 언젠가 엘리베이터에서 정원이에게 말을 거는데, 지켜보던 어르신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아이한테 노래하듯 말하네요.”
그렇습니다. 저는 노래하듯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마주 보고 웃을 거예요. 정원이와 함께 사는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가지요. 노래하듯 흐르는 삶의 속도는 이전과 매우 다릅니다. 하루의 리듬을 만들고 일상을 쌓아간다면, 아이는 아주 조금씩 커나갈 겁니다. 비록 도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원이와 함께 걷는 이 길이 다정한 음표처럼 소소한 즐거움으로 채워지길 바랍니다.
삶이 음악이라면 너와 함께 걸을게
두 눈을 마주하고 노래하듯 기쁘게
브런치북 <자폐를 가진 정원이의 세계> 1부는 변방의 언어로 머물던 ‘장애’가 아니라, 보통의 아이 정원이가 가진 자폐를 이야기합니다. 2부는 ‘서포트 리포토 for 정원이’로 직접 활용했던 리포트를 통한 구체적인 사례를 기록합니다. 이어서 행정학자인 엄마의 시선으로 정책의 틈을 이야기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asd-pap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