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정원이’ 소개
안녕하세요.
4개월간의 긴 공백을 깨고 다시 브런치북 연재를 시작합니다.
다시 이 연재를 어떻게 시작하나 고민했어요. 2025년 여름 하나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그 변화의 흐름은 아직 제 안에서 정리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제 시점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아서 브런치북 제목을 <자폐를 가진 정원이의 세계>로 변경했습니다. 그리고 <서포트리포트 for 정원이> 브런치북과 이어서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두 개의 브런치북을 합치는 과정에서 기존에 발행됐던 글이 수정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어서 무척 기쁩니다.
ㅡ 인생정원사 드림
오늘은 정원이 소개를 다시 하고자 합니다. 용기를 내어 정원이의 모습을 텍스트로 구체적으로 그려보려고 해요.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는 하나의 진단명을 갖고 있지만 조금씩 다릅니다. 비슷한 점도 있지만 고유한 특성이 있어요. 그래서 정원이 하나의 이야기에 더 집중해서 그려내는 과정이 더 의미 있으리라 생각됐습니다. 아이와 함께 유튜브를 하기도 하고 책을 쓰기도 하고 사회운동을 하기도 하지요. 각자의 자리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 자체가 스펙트럼의 빛과 결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계속, 계속 정원이의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정원이는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중증 자폐스펙트럼을 갖고 있습니다. 지적 동반에 간헐적인 뇌전증이 있어요. 2021~2024년까지 총 4번 전신발작을 했고, 올해 뇌파 검사 시 경기파를 발견했습니다. 치료는 아주 어렸던 26개월부터 시작했어요. 10살인 지금까지 언어치료는 단 한주도 쉬어 본 적이 없지만 무발화입니다. 현재는 AAC(보완대체의사소통기기)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고 있어요. 구어발화(말하기)와 함께 생각을 동작으로 연결하는 실행도 느린 편이라 제스처로 의사 표현하기도 최근 몇 가지 레퍼토리가 생겼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기와 젓기, 손짓으로 하는 ‘주세요’, ‘아니’, ‘이거(원거리의 ‘저거)’는 아직 어렵습니다.
요새 정원이는 가슴을 톡톡 두드리며, ‘나’라는 표현을 하지요. 1-10의 숫자 사이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정도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수업 열심히 했어?라고 물으면 열심히 한 날에는 9에서 10, 그렇지 못한 날에는 3-4라 하지요. 어제처럼 몸이 아파도 최선을 다한 날에는 7이라고 대답합니다. 물론 모든 이에게 일관되게 답하진 않아요.
'정원이 엄마'인 저는 무릎수술을 고등학교때 했고, 정원이를 키우며 섬유근육통을 진단받았습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고된 삶을 살았기에 아픈 줄로만 알았죠. 그래서 최근 연재하는 브런치북 <새벽고담>에서 통증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2년 전 정원이의 첫 전학에서 트라우마에 가까운 경험을 했어요. 그 이후에는 트리거를 관리 중입니다. 저는 이렇게 아이에 관한 글을 공개적으로 쓴 것은 1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브런치에서 처음입니다.
자, 그럼 물을게요.
최근 운전하다가 행복하단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아이는 이 4개월 동안 전학을 했고 적응을 했고 또 아프다며 5일간 굶기도 했어요. 삶은 여전히 비슷한 모습으로 계속되었어요. 고된 날도 있고 웃는 날도 있어요. 생활이 힘든 것은 당연합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겠지요. 그저 깨어있을 때는 순간순간 행복을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아프다는 것, 그리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받아들였어요.
여전히 애써도 정원이는 많이 느렸지요. 아이와 살아가는 삶은 모래주머니에 묶여 뛰어가기엔 버거운 인생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할 것만 같아요. 제게는 아직 결승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상황이 극적으로 불행하지도 않아요. 이 또한 삶의 일부니까요. 그저 아이의 '다름'을 눈치챘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하나의 결심은 내내 갖고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이것저것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애쓰지 말란 소리도 많이 들었지요. 그래도 그렇게 하는 매 순간마다 조금씩 기쁨을 느낍니다. 그 기쁨이 모여 행복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고, 순간을 곱씹으면서 다시 내일을 준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결국 행복하단 걸 느낄 때는 삶이 안정되는 잠시잠깐의 순간이었어요. 여전히 현실은 또 다른 고비가 되풀이되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느끼는 것은 지금 제 삶을 조금씩 꾸려갈 수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고립보단 고독한 것을 좋아합니다. 둘 다 혼자란 뜻이지만, 전자는 원하지만 갖지 못하는 것이고 후자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죠. 현실은 혼자입니다만 고립이라 하지 않을게요. 어렸을 때부터 고독과 고요가 좋았으니 고독한 것으로 해두려고요. 저 혼자 글 쓰고 그림 그리고 공부를 하는 것은 정원이 보는 틈틈이 가능합니다. 빠듯한 삶에서 기운을 낸다면 이룰 수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그것조차 에너지가 들었어요. 그러나 무엇인가 공동 프로젝트를 하거나 직장에 다니는 것은 어렵습니다. 마음이 놓이질 않거든요. 돌봄과 돌봄 사이의 틈은 제가 메꾸어야 하니까요. 틈을 다른 이에게 아직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런 자유는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이었어요.
한 때 갖지 못하는 것을 원할 때는 무척 힘들었어요. 어쩔 수 없이 제한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을 했어요. 박사학위 받고 경력단절이 됐으니 아깝잖아요? 옛 경력을 이어가고싶은 욕심을 내려 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만 집중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할 수 있는 것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부수적인 인간관계를 덜 신경 쓰고 사는 자유를 얻기도 했죠. 정원이를 돌보는 과정은 물리적으로 고되고, 아이에 대한 감정은 안쓰럽고 사랑하는 감정의 총체지요. 그러나 원망한 적은 없어요. 정원이 때문에 외로운 인생이 아니라, 인생이 원래 혼자 사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고요한 것을 좋아해 고독하게 사는 걸 나쁘게 여기지 않습니다.
단어란 참 신기하죠? 마음의 프레임을 더해 주니까요. ‘고독’은 제 스스로의 선택이고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지금 상황을 편하게 받아들이게 해 줍니다. 그래서 지금은 조금 더 주변을 살필 수 있게 되었어요. 대단한 것을 이루기보다 지금 제가 내밀 수 있는 손의 '기회'를 잊지 말아야겠어요.
그 순간이 저는 무척 좋습니다.
브런치북 <자폐를 가진 정원이의 세계> 1부는 변방의 언어로 머물던 ‘장애’가 아니라, 보통의 아이 정원이가 가진 자폐를 이야기합니다. 2부는 ‘서포트 리포토 for 정원이’로 직접 활용했던 리포트를 통한 구체적인 사례를 기록합니다. 이어서 행정학자인 엄마의 시선으로 정책의 틈을 이야기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asd-papers
표지의 그림은 순간의 시간 조각들을 모아 제가 그린 그림입니다. 제 마음 속의 풍경을 퇴고하면서 그림에 담았더니 정말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