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이의 세계, 엄마의 세계
처음 정원이를 만났을 때 아주 신기했어요. 아주 작고 하얗고 옅은 머리칼빛이 제 어린 시절과 꼭 닮았죠. 그 순간의 벅참을 전 기억하고 있습니다. 까만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눈을 깜박이는 모습도 선명하죠. 웃으면 눈이 그림처럼 반달눈이 돼요. 그건 여전히 남아 있어요. 어느새 정원이는 초등학교 3학년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손안에 쏙 들어왔던 자그맣던 발은 이제 저랑 1센티밖에 차이나지 않아요. 웃는 얼굴로 절 꼭 껴안아줍니다. 지금의 정원이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꿈꾸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아기향이 묻어있어 사랑스럽습니다.
자폐를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이에게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함께 생활하는 가족도 마찬가지였죠. 온전히 쉬려면 누군가 아이를 맡아주어야 쉬는 것이 가능했어요. 셋이 한 세트처럼 다니던 가족도 이제 조금 분리돼서 번갈아 쉬고 있습니다. 만 9년의 육아시간이 흘렀고 저희는 나이가 들었으니 체력을 비축해두지 않으면 돌보기 어려울 때도 있어요. 정원이는 한창 크는 활동적인 남자아이니 까요. 그래도 아이는 저랑 가장 오래 있어서 저랑 있는 것이 편했답니다. 저도 아이와 분리해서 다니는 것은 쉽진 않았어요.
정원이의 장애를 알고 나서 몇 년간은 남은 생은 아이를 위해서 살면서 보내자라고 생각했어요. 24시간 150% 정원이만 생각하고 살았어요. 대학병원 진료일이 되면 전날 2시에 아이 옆에서 새우잠을 잤으면서도 새벽같이 일어나 교수님께 드릴 리포트를 타이핑했지요. 그때 은연중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이가 무발화고 발달이 느린 것이 제 노력부족은 아니라고요.’
아기띠를 메고 버스를 타고 대학병원 언어치료실을 1시간 반 걸려 갔던 7년 전부터 지금까지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요. 하루에 센터를 도돌이표처럼 돌고 자는 아이를 업고 대기실에 눕혀 재우고, 보온도시락 밥을 꺼내 먹이기도 했지요. 그 과정은 분명 정원이와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좋다는 언어치료수업을 찾아다니고, 대기를 넣고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했어요. 노는 것도 중요하니 매일 놀이터로 공원으로 숲으로 가서 놀았습니다. 그네도 조금씩, 엎드려 타다가 앉아서 타다 서서 탈 때까지 꼬박 4년이 걸렸죠. 구름다리도 한 발 한 발 건너는 것을 응원하고 손으로 잡아주고 하면서 3년이 걸렸어요. 아이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하면서 꾸준히 했던 것 같아요. 밥도 매일 밥과 국, 새로운 반찬을 하나씩 추가하면서 레퍼토리를 늘려갔습니다.
제 옷 한 벌, 가방 하나 제대로 안 사면서 저축을 했고요. 늘 운동화 차림이었죠. 정원이는 늘 말끔하고 예쁘게 입혔어요. 온통 정원이 교구와 치료를 복습할 장난감만 샀습니다. 과정은 고단해 보였겠지만 힘들진 않았어요. 오로지 정원이에게만 집중하면 가능했죠. ‘난 최선을 다하는 엄마야!’라고 스스로를 믿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원이의 소아정신과 진료에서는 아이의 발달과정을 기록하고 정리해서 가져갔어요. 그 기록에는 정원이는 있지만 저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글들은 아주 짧고 차마 적지 못해 비공개로 해두었죠. 간절한 소원으로 채워진 글자였습니다. 그 당시의 기억은 행복했지만 희미했고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앞만 보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매일 해야 할 일들과 목표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A성적표를 받고 싶었던 것일까요?
어느 누구에게도 너의 노력이 부족하단 이야길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요. 노력을 했지만 쉽지 않았지요. 같은 자폐를 가진 아이를 키운 ‘동료엄마’들도 자신의 노하우를 가르쳐 줄 때면 내가 정말 너무 느긋하고 소극적인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정말 정말 애써왔는데 왜 늘 부족한 생각이 들었을까요? 내가 뭔가 더 열심히 했더라면 정원이가 더 자랐을까요? 여기서 뭘 더 해야 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한 주에 20회기씩 치료 다니면서 놀이도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한 몸으로 붙어있었는데 말이죠. 사실 지금도 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없었어요.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정말 불안했죠.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아이는 자폐에 더해 뇌전증까지 갖게 되었지요. 불안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함께 있으면 오히려 편했어요.
정원이는 계속, 아기처럼 맑고 사랑스러웠죠.
정원이가 조금씩, 자란 것은 제가 ‘저만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우연히 그때가 맞물려 쑥 자랐는지도 모르겠어요. 정원이가 의사표현을 말 아니라 카드라도 조금씩 하게 되고, 아이아빠든 활동지원사든 누구에게라도 정원이를 맡기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갔어요. 그 과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원활하지도 않았고요. 때로는 데가 아이의 손을 놓기가 어려웠어요. 늘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죠. 정원이 역시 엄마와 떨어지는 게 힘들었습니다. 엄마가 제일 안정감 있고 편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매 순간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아이 보는 걸 힘들어하면 괴로웠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만 아이를 보면 모두가 행복한 거 아닐까?‘ 이렇게 힘겹게 공부를 하고, 시간을 내어 무엇인가를 하는 게 의미 없다 여겼지요. 나만의 욕심인 것 같았습니다. 매 순간 이렇게 고통스럽게 아프고 싸우면서 시간을 만들어냈죠. 누군가 등을 떠밀어도 무력하기만 했던 제가 마치 홀린 듯 운동을 하고 공부를 했어요. 공부 한 줄 하려 해도 저는 아이를 맡길 시간이 필요했죠. 정원이 아빠도 친정엄마도 겉모습도 내용물도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달라지고 있다고 놀랐습니다.
멈출 수 없었어요. 오랫동안 수면 아래 잠겨 있던 무엇인가를 끄집어낸 것만 같았어요. 아이와 함께 사는 동안 단문으로 밖에 말하지 못했던 저는 이제야 저만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정원이도 엄마가 모르는 세계를 꾸려가고 있어요. 올해 저는 유난히 바빴고, 정원이도 유난히 아팠습니다. 아마 이것은 마음의 탯줄이 떨어지기 위한 마지막 성장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정원이를 위한 공부, 정원이에 대한 글, 정원이 모습을 그리는 것이지만요. 그 결과는 정원이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겁니다. 전처럼 마냥 평화롭지 않고 더 아플 때도 많지만 오히려 지금이 제겐 선명하고 아름답습니다.
저는 정원이의 세계 안에 같이 살 수 없었어요. 한 때는 그것이 가능하리라 여겼지만 불가능했죠. 대신 저의 세계를 만들어 아이의 세계를 지탱해 줄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여전히 손을 꼭 잡고 안아줄 수 있었습니다. 정원이를 처음 만난 날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그 순간 새겨진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합니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부모에게 분명 쉽지 않고 힘든 일입니다. 고단하고 버거운 날인 것은 분명해요. 저도 약한 존재니까요. 지금도 잠을 잘 때면 출렁이는 통증에 새벽에 깨기도 하고, 반소매 아래 드러난 팔의 거뭇한 자국을 보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정원이가 귀를 막거나 밥을 먹지 않으면 일상이 올스톱 되고 마음이 아파요. 몇 시간씩 운전해야 겨우 울음이 잦아들기도 합니다. 여전히 그래요.
그러나 맑은 날이 훨씬 많아요. 엄마와 함께 가는 등굣길에 만점이라 ‘이야기’하는 정원이 덕분에 괜찮습니다. 지금도 까맣고 짙은 정원이의 눈을 바라보면, 그 안에 때 묻지 않은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닫죠. 세상 속의 우리는 멀리서 바라보기에 무발화 중증 자폐라는 ‘비극’이지만, 내 아이 정원이 눈 속의 기쁨은 순수한 ‘희극’이죠. 스스로 신발을 신고, 지퍼를 열고, 빨대를 꽂고, 숫자를 가리키는 모든 것이 제게도 기쁨이 되어줍니다. 대부분 미처 못 보고 지나갔을 작은 성장의 순간이지만요.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 보면 희극이라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 덕분입니다.
브런치북 <자폐를 가진 정원이의 세계> 1부는 변방의 언어로 머물던 ‘장애’가 아니라, 보통의 아이 정원이가 가진 자폐를 이야기합니다. 2부는 ‘서포트 리포토 for 정원이’로 직접 활용했던 리포트를 통한 구체적인 사례를 기록합니다. 이어서 행정학자인 엄마의 시선으로 정책의 틈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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