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前生)과 현생(現生)을 잇는 시차
이 내용을 브런치 북에 담을지 조금 고민하다 2부가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될 것 같아 마지막에 이르러 이야기를 합니다.
'휴, 이제 돌아갈 일은 없겠지, 아마!'
저는 정원이를 낳고 나서는 과거의 영광(?)은 깨끗하게 상자 속에 넣어두었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상자는 아주 강력한 테이프로 밀봉해 두었습니다. 다시 열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상자 위에 네임펜으로 [전생]이라 큼지막하게 써두고 마음속 깊숙이 숨겼습니다. 꺼내 보았다가 속상할까 봐 두려웠지요.
네, 전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박사님'이라 불리기도 전에 바로 정원이 엄마가 되었습니다. 2016년 2월에 졸업식을 하고 같은 해 10월에 정원이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해도 정말 대단한 해였어요. 같은 해 5월에는 내 집 마련까지 했지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학위를 받은 저를 칭찬했지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래도 두 돌까지는 내 손으로 키우고 사회에 복귀하자고 생각했지요. 나름 꿈이 있었고 같은 주제의 논문으로 한 우물만 팠었거든요. 그때의 주장은 어쩌면 피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실패를 모르는 천진한 세계만 보았거든요. 정확히는 어렵게 살았어도 노력하면 이뤄지는 세계였습니다. 자유롭게 대학원 수료를 하고 현장에서 3년 일하고 나서야 논문을 쓰기 시작했죠. 남들이 잘 가지 않은 길이었지만 내가 개척하면 된다 믿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예 잊고 지냈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돌아갈 자신은 솔직히 없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달리다 보니 꼬박 9년이 흘렀습니다. 도움이 된 것이 있다면 제도에 대한 이해가 빨라서 발달장애 관련한 바우처 신청하는 서류 쓰기는 조금 쉬웠어요. 그리고 아이의 성장을 기록하고 관리하는데도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2006년에 대학원에 입학하여 2011년에 수료하고 2016년에 졸업하는 11년 동안의 노력을 활용한 것은 딱 그 정도였습니다. 사실 아쉽진 않았습니다. 그 후로 9년 동안 전 아무런 논문을 쓰지 못했으니 경력단절이잖아요?
‘직장부터 구할 걸 그랬나.’
가끔 후회도 들더라고요. 조금 더 나이가 어려서 체력이 좋을 때 더 일찍 아이를 낳지 싶었어요. 왜 연애는 3년, 신혼은 2년 동안 학위논문 쓰느라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후회는 몸이 나빠진 상태에서 아이를 낳아서 더 고생하나 싶은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거기서 끝입니다. 정원이를 만난 것 자체는 절대로 후회하진 않았습니다. 아이가 안타깝고, 고된 삶이 버거울지라도 지금의 내 아이를 부정하면 안 되잖아요. 저만큼은 아이를 세상에 낳아 준 엄마니까요. 그 책임이 얼마나 무겁고 영속적이든 그것은 제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원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계속 밀봉하고 차곡차곡 마음속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정원이 엄마이자 정원사가 더 익숙하고 편하기도 합니다.
"박사님."
정말 얼마 만에 들어보는 호칭일까요. 정원이 보다 한 살 많은 지인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아이는 한 살 정원이가 어리고, 엄마나이는 제가 한 살 더 많았습니다. 아이 태어나고 박사학위를 받았더라고요. 심지어 같은 행정학 전공이었습니다. 그녀는 일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조금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버려두고 밀봉했던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니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상자를 감싸고 있던 테이프에 조금 균열이 생겼습니다. 2년 동안 자신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할 때도 원래 전공으로 돌아가진 못했습니다. 다시 정원이에게 도움 되는 공부를 시작한 것뿐이니까요.
글을 쓰면서 부산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공모전 면접 때문이었지요. 부산은 세 번 갔었어요. 15년 전 영화사 사람들과 프로젝트 피칭을 하러 갔었습니다. 그리고 10년 전 학위논문을 위한 인터뷰 때문에 갔었습니다. 프로듀서도 박사도 정원이 엄마도 아닌, (예비) 작가의 신분으로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부산에서의 제 모습이 아주 낯설고 멀게 느껴졌지요. '전생'이란 말이 실감이 갔습니다.
공모전 면접 때 정원이 이야기, 자폐에 대한 이야기를 제출한 원고에 더해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직 난 정원이 엄마구나. 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더라고요. 물론 정원이 엄마로 잘 해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폐는 유전자 단계에서 결정되는 돌연변이고 원인을 모릅니다. 모른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탓을 하면서 질책하고 그걸 원동력 삼아서 앞으로 나가야만 했고, 그 누군가는 저였습니다. 제일 탓하기 쉬운 존재잖아요. 정원이 아빠도 박사고 저보다 아주 열심히 노력해 온 사람입니다. 제가 돈 한 푼 못 벌면서 시간을 내어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미안한 일입니다. 제가 무엇인가를 하려면 정원이를 맡겨야 하니 부담을 지우는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당연하게 나의 커리어는 포기하게 되는 이 상황이 밉기도 했습니다. 그를 탓하지 못해 저를 탓하게 되었죠.
이상하게도 제대로 적지 못했던 지난 시간을 기록할 용기는 나를 용서할 때 생겼습니다. 아무것도 적지 않으면 텅 빈 경력단절의 9년으로만 기억될 것 같았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눈물도 땀방울도 기록해 두어야겠습니다. 인생의 가장 치열한 순간이 공란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꿈틀꿈틀, 상자를 감싸던 테이프가 모두 찢어졌습니다. 찢어짐은 참으로 고통스러웠어요. 정말 쉽지 않았어요. 엄마지만 엄마로서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밀봉해 두었지만 경험은 고스란히 상자 속에 담겨 있었지요.
"여러분, 정책을 계속 살펴야 해요!"
얼마 전 발달장애 아동의 엄마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의 부모교육 강연을 들었습니다. <아들이 사는 세계>의 류승연 작가님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꾸는 꿈을 이룬 사람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귀담아듣던 찰나, 저 한마디가 귀에 쑥 박혔습니다.
제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꾸준한 정책확대 및 변화에 대한 연대가 필요하리란 생각이 들었지요. 제도의 방향성을 알아야 그 제도를 누릴 수 있는 준비를 아이와 함께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모두의 선택은 달랐고 방향성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성을 갖지 않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정책과 영화산업의 '시차'에 대한 논문을 썼거든요. 그리고 지금은 보지도 못할 영화, 일하지도 못할 연구에 대해 뭐 그리 많은 투자를 했나 싶어 한탄만 했지요. 그래서 영화를 잘 못 보았어요. 그분이 정책의 방향을 가늠하면서 아이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귓가에 남았습니다. 그 순간 지난 모든 경험이 꼭 무의미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지요. 전 정책연구자이자 발달장애 당사자의 부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논문이 아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썼던 '시차'란 키워드는 발달장애 정책에서도 유효했단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열심히 했던 노력은 남았지만 말하던 바는 조금 피상적인 이상향이라 그동안 이리 오랫동안 방황한 것이라고요.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아주 구체적이고 절실한 것들이라 이렇게 설레는 것이라고.
아주 작은 불꽃이 제 마음속에 조용히 피어올랐어요. 앞으로 그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 같아요. 지금 겪어온 성장통 보다 더 큰 아픔과 노력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막연히 전생으로만 버려두었던 먼지 쌓인 시간들이 지금 나의 자리에서 다시 의미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무척 기뻤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이 작은 희망이란 불꽃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온기니까요.
브런치북 <자폐를 가진 정원이의 세계> 1부는 변방의 언어로 머물던 ‘장애’가 아니라, 보통의 아이 정원이가 가진 자폐를 이야기합니다. 2부는 ‘서포트 리포토 for 정원이’로 직접 활용했던 리포트를 통한 구체적인 사례를 기록합니다. 이어서 행정학자인 엄마의 시선으로 정책의 틈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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