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장소에서의 발달장애
아이와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나는 이렇게 아이의 글을 써도 괜찮은 것일까. 난 정말 정원이의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 정원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결국 정원이가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의 이야기니까요. 저와 정원이의 오늘이죠. *물론, 아시다시피 정원이의 이야기가 모든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아이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저의 수술로 시작한 2025년 4월은 정원이의 단약으로 끝났습니다. 4월은 찬란한 봄이기도 했지만 잔인한 달이기도 했지요. 매해 4월은 참 어려운 일이 반복돼서 일종의 징크스 같습니다. 약물복용이란 것은 참 어려워요. 이전 화에도 이야기했지만 득과 실, 그 어딘가를 가늠하면서 복용을 결정하거든요. 하지만 실(失)이 치명적인 위험을 내포하게 되면 아무리 좋은 효과가 있어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부모가 가져야 할 아이에 대한 윤리적인 마음가짐이라 생각합니다. 정원이는 지난주 병원에서 섬망 의심을 받았어요. 원인을 찾아야 해서 일단 단약 할 수 있는 약을 먼저 선택해서 단약을 하고 있어요. 다행히도 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할 정도로 좋았던 기분은 가라앉았습니다. 섬망의 원인을 찾은 걸까요? 아직 약속된 진료일은 며칠 더 남아서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대신 지난주는 단약 첫 주라서 일주일 정도 내내 울었어요. 정신과약은 감정과 기분, 불안, 충동 등을 조절합니다. 내부적인 감각의 변화가 크게 느껴지지기도 할 텐데 정원이는 이를 표현할 방법이 적지요. 그래서 우는 것으로 그 변화를 감당한 것 같아요. 아침 점심 저녁 빼고는 나가자고 내내 울었습니다. 정원이는 불안하면 전정감각을 원하거든요. 아기였을 때는 유모차였고 지금은 엄마아빠 차 혹은 킥보드를 태워달라고 합니다. 품 안에서 흔들거리듯 움직이면 뭔가 안정이 되나 봐요.
섬망 의심이 들었던 통제되지 않았던 1주일, 이후 단약 하면서 밤낮없이 울면서 나가자고 떼쓰던 1주일, 그리고 이번 주는 울음이 그치고 낮은 각성에 버티는 한 주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매일매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일상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출 순 없습니다. 결국 이 모든 노력은 아이가 학교를 가고 가정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단약 첫 주차, 전 실습 계획서를 제출해야 했고, 정원이는 학교에 나가야 했습니다. 정말 어려웠어요. 불안한 생각은 내가 정말 치료사의 일(=실습)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란 자책으로 확장되기도 했습니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최선이 아닐까 싶었어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아이와 오롯이 있음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싶어서 이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면서도 기회비용을 확인하는 과정은 때로는 아프고 잔인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가능성은 제가 직업을 다시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었고 기회비용은 아이와의 결핍이 물리적인 아픔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픔은 마음 속에서 살갗 위에도 있었습니다.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혐오의 시선은 정원이와 함께 다니면서도 조금씩 느낍니다. 정원이와 저는 공공장소에서 늘 소곤소곤, 살금살금이라고 언어와 제스처로 주의를 주면서 다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는 가끔 소리를 지리고 바닥에 주저 앉아 물장난을 하기도 합니다. 간혹 소변실수도 하지요. 적절한 행동을 가르치려면 사회 안에 있어야 하는데 부모는 그 사회의 시선이 무척 아프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현관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만 있는 시간이 아이의 몸집이 커질 수록 늘어납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연습도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운전을 하게 되었죠. 운전을 하면 마음은 편한데 집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결국 경험의 기회는 줄어들고 맙니다. 말로 되면 발달장애가 아니란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때가 되면 이런 애들은 이런 행동을 한다 했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아이도 사회의 구성원이지요. 적절한 사회활동은 아이의 성장에 도움을 줍니다. 그 과정의 시행착오로 불편함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함 땜에 단 둘이 인적이 드문 곳만 다닌다면 결국 아이는 사회를 배울 기회를 잃어버리고 밥니다. 경험을 통해 적절한 행동을 배워야 하죠. 옳고 그름을 가르쳐줄 기회는 경험에서 비롯되니까요. 시끄러워서 사람많은 곳에 가는 것은 저희집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요. 왜냐면 그때 반응을 살펴보고 조절하는 방법을 미리 궁리해야 더 큰 실수로 이어지지 않으니까요.
잠시 잠깐 눈을 떼면 아이는 뛰어나가기도 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손목을 꽉 잡고 있어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장애인주차장 스티커가 발급되지요. 아이가 휠체어를 타지 않고 걸으니 눈총을 받기도 합니다. 발달장애는 겉모습은 여느 또래와 같아서 오해를 받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모든 아이는 누군가의 가족이입니다. 식당에서 시끄러운 아이를 보면 아마 다들 인상을 찌푸려도 조금씩 참으며 배려하기도 합니다. 다들 케어가 힘든건 가족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거든요. 다만, 부모 역시 미리 예방하고 준비해서 적절한 행동을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저희집은 교대로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구경시켜서 음식 나오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또, 공공장소에서 둘이 이동할때 예상되는 행동을 다소 큰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아이에게 미리 예고해서 준비를 시킴과 동시에 주변에 알리는 것이죠. 이아이는 이런 특징에 따라서. 지금은 낭랑하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처음부터 수월하진 않았습니다. 시선은 늘 아프거든요. 부모는 더 민감하게 알아차립니다. 사실 부모도 미리 다 준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 자식이 자폐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미리 공부하겠나요. 부모도 처음이니 배워갑니다. 저 역시도 정원이와 함께 성장했지요.
아무리 아파도 저는 정원이와 함께 외출합니다. 정원이가 커갈수록 낯설고 두렵게 사람들은 느낄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세상 밖에 내놓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어떨때는 알몸으로 가시투성이 동굴을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때로는 더이상 나가지 못해 주저 앉기도 합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이 손을 붙잡고 오늘도 외출하지만 그 시선이 늘 친절하고 상냥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믿고 있습니다. 보는 만큼 이해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늘어날 것이라고요. 그것이 제가 글을 쓰는 이유이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아이에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요. 설령 아름다운 모습만 있지 않고, 저 자신이 다칠지라도요. 정원이도 사랑을 알고 따뜻함을 소중히 여깁니다. 다만 소통이 어렵고 발달이 느려서 때때로 이해받기 어려운 행동들을 합니다. 그것이 어렸을때는 다른 이를 긁거나 무는 행동으로 나타났었어요. 약을 먹고 재활을 가르쳐도 단시간에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종종 약을 먹이란 이야기를 듣습니다. 물론 먹고 있지요! 어느 누구도 하루 아침에 가능하겠어요.
매순간 저도 강하지 못합니다.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결국 업을 때도 있어요. 사람들 사이에서 완벽한 훈육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때마다 제 자신이 그저 약한 엄마임을 깨닫곤 합니다.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아이와 외출하지만 그 싹을 틔워 꽃을 기다리는 것은 지난한 기다림이거든요. 그래도 언젠가 정원이에게 한 송이 꽃을 선물 받는 기적 같은 날이 제게도 오겠지요. 그때까지 조금 상처투성이여도 괜찮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