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지만, 조무사실습생처럼 일합니다

호텔을 꿈꾸는 병원 덕에

by vonnievo

얼마 전 나는 한방병원으로 이직했다.
어쩌면 조금은 후회 중인지도 모르겠다.

요양병원에서는
핸드폰에 누군가의 엉덩이 사진이 쌓여가고
퇴근할 때마다 몸에 똥냄새가 배어버리는 듯한 환경이 힘들었다면
여긴 그런 건 없다.

항상 구걸하듯 병동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모자란 물품을 채울 필요도 없고
누군가의 죽음이 익숙해지는 내 모습에 소름 끼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한방병원으로 이직한 후의 나는 조금 더 빈번하게 퇴사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다.






사실 퇴사하고 싶은 결정적인 이유는 없다.
급여도 전보다는 올랐고
크게 어려운 일도 없고
특별히 누가 싫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자주 현타가 오고, 간호사로서의 자부심이 시도 때도 없이 깎여나간다.
조무사 실습생이 하는 일과 내 일이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오늘도 하루종일 린넨의 수를 세고 침상을 정리했다.
조용히 병실 청소를 하고 있노라면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4년씩이나 대학을 다녔나, 하는 생각이 문뜩문뜩 머리를 스치곤 한다.

여기선 간호사로 일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간호사 업무 빼고 모든 것을 하는 곳이다.
예컨대, 내 업무 중에는 치료시간 안내가 포함되어 있다.
치료 10분쯤 전에 온 병실을 돌며 알람마냥 안내하고, 혹여나 해당 환자가 자리에 없다면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야 한다.
그러다가 퇴원하는 환자가 보이면 졸졸 따라가서 응대해야 한다.



카드키는 반납하셨어요?
짐은 다 챙기셨나요?
두고 가신 것이 없는지 다시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고 건강하세요~





저 행위가 병원의 평가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런 것을 시킬 만큼 이곳은 평가에 예민하다.
덕분에 나는 이곳에 당도한 후로 주사기는 구경도 못해봤다.




주사는 언제 맞으시겠어요~?





여기서는 단순한 주사처방 하나도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주사 맞는 것에 대해 환자와 원만하게 합의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보통 내 업무효율과는 동떨어진 시간을 얘기해 주는 덕에, 머릿속으로 '3시에 한 명, 5시에 한 명' 하면서 지속적으로 읊어줘야 한다.
약을 돌리는 시간처럼 무언가 시간이 정해진 행위가 있을 때에도 예외는 없다.

근무자의 절반이 올해 갓 면허를 딴 신규간호사들이지만, 환자들이 컴플레인하면 안 되니까 주사는 2번 이상 놓을 수 없다.
그래도 꼭 들어가야 하는 약이 아니니까 괜찮다.
실비보험이 커버해 주는 비싼 비타민 주사니까 기껏 준비했다가도 깨끗하게 버리면 된다.

이러다 보면,
환자가 주사 놔달라고 하면 의사가 처방을 내고, 환자가 안 맞겠다고 하면 의사가 처방을 지우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자, 그다면 처방을 내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한방병원은 경력으로 쓸 수 없을 물경력이라던데, 근무하다 보니 한방병원이 왜 물경력인지 알 것 같다.
우선 기본적으로 환자들이 환자가 아니다.

체감상 90%는 교통사고 환자들인데,
교통사고 난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 심하게 다친 사람들은 한방병원에 오지 않으니
내가 보는 이들은 주로 '자동차 보험', '합의'를 위한 방문객들이다.
그래서인지 다들 밥도 잘 먹고 걷기도 잘 걷는다.
오죽하면 주치의들도, 파트장도, 아무도 라운딩도 돌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가하다는 뜻은 아니다.
화장실 한 번을 제때 못 가서 생리혈을 묻힌 채 빨빨거릴 정도다.

응급상황이 터졌다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퇴근하면서 항상 '오늘은 대체 왜 바빴지?'라며 복기해 보곤 하는데, 대부분 쓰잘데기 없는 것들 덕분이다.


화가 나는 점은,
병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주제에 병원다운 것들은 하나도 못한다는 점이다.
비타민은 종류별로 구비해 놓은 병원이지만, 그 흔한 혈압약 하나가 없다.
뭔가 문제라도 생기면 응급실로 보내자는 마인드다.
내가 낸 건강보험료가 차곡차곡 저런 나이롱환자들의 영양제를 위해 소비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개탄스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