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장근무는 네 능력 탓

이직하길 잘했지, 나 #2

by vonnievo

01_ 연장근무는 네 능력 탓




5시 30분.
퇴근 시간에 딱 맞추어 저장 버튼을 누르곤 홀로 뿌듯해하는 나를 향해 한 분이 후다닥 달려왔다.
뭔가 잘못했나? 어디선가 수정 연락이 왔나?
오만가지 생각에 심란하던 나에게 그녀는 다급히 소리쳤다.






선생님! 뭐해요! 빨리 퇴근해요!








중소병원의 병동 출신에게 대학병원의 상근직의 일상이란 여러모로 충격의 연속인데, 그중 하나가 칼퇴다.

정확한 출근시간과 정확한 퇴근시간.
병동의 신규간호사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칼퇴가 낯설었다.



병동에 8시간만 있으면 뭐 해.
병원에 12시간을 있는데.





올해 빅 5* 중 한 곳에 입사한 나의 동기는 매일매일 연장근무를 한다.
2시간 일찍 출근해서, 2시간 늦게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란다.

병동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단 8시간뿐이지만, 일의 양은 절대 그 안에 해치울 수 없는 수준이어서 늘 원내 한편에 자리한 채 잔업을 마무리한다고 한다.
그러면 일은 일대로 하고, 연장근무수당은 받지 못한다.

말세다, 말세야.
병원 코앞에 살면서 7시부터 나이트** 출근을 할 바에는 차라리 매일매일 더블*** 근무를 뛰게 해 달라...!



*빅 5 [빅파이브] : 서울의 메이저 병원을 일컫는 말로,
서울성모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을 뜻한다.
'sky' 대학과 비슷한 느낌이다.

**나이트 : 병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밤 번 근무자는 10시-11시부터 근무를 시작한다.

***더블 : 하루에 데이, 이브닝을 연달아 근무하는 형태. 기본적으로 16시간 근무를 한다. 더블 근무 시에는 연장근무 수당을 받는다.







네 능력이 부족해서 시간 내에 못 끝냈으면서,
왜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해?





고용주들의 오만한 생각 덕분에,
12시간을 내리 뛰어다니는 나의 친구는 한량처럼 일하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월급을 받고 있었다.

슬프게도 저런 생각이 한국 사회엔 만연한 것인지,
간호와는 거리가 먼 친구들마저 적절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어떻게든 열정페이로 굴리고 나면 끝이라 생각하겠지만
그 끝엔 다 갈리고 남은 찌끄래기들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차마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나의 나라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이럴 때마다 정말 '헬조선'이라는 말이 뇌리에 스친다.










02_ 식사 시간엔 밥을 먹고, 빨간 날엔 쉽니다.





밥을 천천히 먹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삶.
이 얼마나 값진 삶인지 아는가.

간호사로 일을 하면 밥을 밥먹듯이 거르는데, 먹더라도 항상 쫓기듯이 게걸스럽게 먹곤 했다.
그래도 체했으면 체했지, 소화를 걱정하진 않는다.
어차피 계속 움직이니 말이다.




이직한 부서에서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서 일을 한다.
하루에 5000보를 넘기기도 쉽지 않다.
밥 먹고 바로 앉기를 반복해서 그런지, 나는 난생처음으로 더부룩함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밥을 꼬박꼬박 먹으니 오히려 배가 고프다.
한동안은 밥을 걸러도 꼬르륵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었는데, 이젠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해 버린 것인지 10시만 되면 허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저희 크리스마스 때 쉬어요?

그럼요~ 빨간 날에는 남자친구랑 놀아야죠~






추석 연휴 3일은 내어줬으나,
설 연휴 4일을 얻어냈다.

나는 비로소 빨간 날에 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정시 출근과 정시 퇴근이 당연해지고, 1시간의 점심시간마저 당연해지고 나니 비로소 온전한 나의 시간이 생겨났다.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꿈이 피어나는 모양이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사람이 그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시작하니
고작 한 살 더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마저 아까워질 정도로 인생이 짧게 느껴진다.


고작 병동에서 한 발자국 나왔을 뿐인데 근무 환경은 180도 바뀌었다.
그러니 나는 더 이상 병동으로 소환될 근미래의 내가 안쓰럽지 않다.
수많은 이직 덕에 비로소 수많은 가능성을 보았으니.








정말이지,
나 이직하길 너무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