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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주리 May 24. 2023

깔딱수 4화 - 직장맘 되기


매주 수요일 깔딱 고개를 넘어가는 직장맘입니다.


수요일마다 깔딱수 연재 중입니다.


오늘은 4화~




맞벌이하는 부모를 데리고 사는 우리 애들은 언제나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가장 오래 남아있는 아이들이었다. 나는 어린이들이 집에 오면 그때부터 집으로 찾아가서 학습지도를 하는 일을 했다. 그러니 우리 애들을 일찍 데리고 오는 일이 불가능했다. 어린이집은 회사 근처에 야간 보육이 가능한 곳으로 보내야 했다. 그래야 일을 늦게까지 하고 남편이랑 나랑 둘이 먼저 끝내는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갈수 있었다. 아이들은 야간 당직 선생님이랑 이미 저녁까지 먹고 책을 보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기다렸다. 나보다도 남편이 조금 일찍 끝나서 먼저 가는 일이 많았다. 언제나 미안했고 밤 시간이면 불안했다. 집에 빨리 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조급함이 생겼다.



그때 생긴 버릇이 있다. 시계를 자주 보는것이다. 보고 또 본다. 몇 분 안 지나갔다. 그래도 또 본다. 아이들 수업 시간엔 그래도 덜 본다. 수업 시간엔 할 걸 해야 하니까 그래도 시간이 빨리 간다. 이동시간엔 시계를 닳도록 본다. 또 다른 버릇은 해가 지면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우리 애들 데리러 가야 하는데 하는 마음에 조급해진다. 해가 가장 긴 하지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가 길면 수업을 늦게까지 해도 아이들은 엄마가 늦는다는 걸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해가 짧아지면 같은 시간인데도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나 보다. 겨울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 맨날 왜 이렇게 늦게 오냐고 한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직장맘이라는 단어는 슬픔이 묻어있다. 아이를 키울 때 더더욱 그랬다. 누가 시켜서 일을 한 것도 아니다. 내가 집에서 아이들만 키우면서 미쳐갈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줬다. 그때 나는 아들 두 명에 쩔쩔매는 초보 엄마였다. 아이들은 걷지 않아서 언제나 엄마는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유모차를 싫어하는 큰애는 손잡고 걷고, 어린 둘째는 유모차에 싣고 외출을 했었다. 걷던 아이는 갑자기 뭘 봤는지 마구 뛰었다. 그럼 잡으러 유모차를 질질 끌고 뛰어야 했다. 그렇게 다니는 것이 나는 왜 이리 힘이 들었을까?



외식도 힘들고 마트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머리 하러 미용실 가는 것도 힘들었다. 맨날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다녔다. 매일 감지도 못했다. 이 모든 일이 남편이 와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하루 종일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목 빠지게 눈빠지게 기다렸다. 혹시 회식이라고 늦는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하루 종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고 마구 성질을 부렸다. 그때는 내가 생각해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나에게 가끔 연락하며 지내던 친구가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전에 같이 일하던 친한 동료 선생님이다. 임신을 해서 배가 점점 불러오는데 자기 교실을 맡아줄 선생님을 뽑고 있다고 했다. 물론 국장님이 선생님을 열심히 뽑고 있는데 자기 교실이 너무 좋으니 나보고 나와서 그대로 수업하면 좋겠다고 한다. 아이를 낳으러 들어가기 전 자기가 했던 좋은 아이들을 좋은 교사가 그대로 이어받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기에 고민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 고민은 사실 흥분이었다. 너무 좋았다. 임신하고 8개월까지 일을 했다. 그 이후로 애 두 명 낳고 4년 정도 쉬었다. 그런 나에게 다시 일을 하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다니. 난 일하고 싶었다. 애 엄마인 것을 잊고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은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일하기 좋은 세상이 아니었다. 아이를 맡아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친정엄마가 근처에 살아서 먼저 엄마에게 부탁을 했다. 애 봐주기 싫다는 엄마에게 용돈을 드리겠다고 했다. 전에는 용돈 한번 못 드렸으니 엄마도 일자리라고 생각하시라고 말이다. 주 4일만 일하기로 했으니 작은 아들만 맡아달라고 말이다. 둘째가 돌 지난 어린아이라 어린이집이 걱정되었었기에 한 명만 부탁했다. 큰 아이만 야간 보육이 가능한 어린이집에 맡기겠다고 했다. 그때 아이들 나이가 4살 2살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모했다. 저런 어린애들을 두고 일하겠다고 생각이라는 것을 했다는 것이 용감했다. 일하고픈 마음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다음은 남편이었다. 애 엄마가 무슨 돈을 벌러 나가냐고 펄펄 뛰었다. 엄마 용돈 드리고 내가 벌어서 대출금을 다 갚아보자고 살살 달랬다. 거기다 친정엄마가 애를 봐주는 것도 못마땅해 했다. 나도 안다. 자식들을 돌본 적 없던 엄마가 손자는 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남편은 돈을 얼마나 벌겠다고 모든 사람 고생시키냐고 끝까지 반대하다가 내 꼴이 점점 이상해지는 것보다 낫겠다고 생각했단다. 애들 고생, 친정엄마 고생, 남편 고생, 나 고생... 하지만 나는 고생해도 일하고 싶었다.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원했으니 말이다.



일단 하기로 했으면 방법은 찾으면 된다. 어린이집을 알아보고 수업시간표를 받아서 남편이랑 아이 데리러 가는 날짜도 짰다. 금요일은 출근을 안 해서 집에서 아이들을 보기로 했다. 친정엄마는 주 4일만 아이를 봐주기로 했고 그것도 저녁 8시까지였다. 월 수만 일찍 나가고 화목은 조금 늦게 출근해도 되니 엄마도 나도 조금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수업시간표를 보니 가능했다. 모든 게 이대로만 진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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