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의 정의

by 심바

바디프로필 촬영을 급히 예약한지라 2.5일 정도 식단을 해야지 하고 저녁에 먹을 오이와 당근과 단호박과 삶은 계란을 준비하다가 갑자기 몇 주전에 잡았던 약속이 이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세상에. 오 마이갓. 만날 때마다 맛집을 탐방하며 먹부림을 하는 언니들과의 모임이 오늘 저녁이다. 원래 만나기로 했던 날짜보다 한 주 미뤄진 약속이라 더 미룰 수도 없다. 저에게 왜 이러시나요... 하기야 누굴 탓하겠어. 바뀐 약속을 캘린더에 저장해두지 않은 내 탓이오, 누가 바프 찍으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니 내 탓이다.




오늘 저녁 약속은 호젓한 분위기의 숙성회가 주인공인 횟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틀 뒤에 찍어야 하는 바디프로필을 위해서 나는 최대한 제한적으로 칼로리 섭취를 해야 한다. 예약해 둔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한 나는 메뉴를 둘러보다 슬퍼지고 말았다. 하. 이 맛있는 것들을 맥주 한잔도 없이 깨작거려야 하는 거야... 주문 전에 테이블에 올려주는 과자 안주는 안 보이는 쪽으로 슬쩍 밀어 넣었다. 나에게 이런 의지가 있었다니 속으로 조금 놀랐다. 바삭거리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를 이렇게 만든 바디프로필 너란 녀석.


월요일 오후에 퇴근시간보다 늦게 마친 교육을 듣고 눈썹을 휘날리며 뛰어온 언니와 근처에 다 와서 길을 헤매다 온 언니가 도착했다. 주말에 완판 되어버렸다는 대방어 대신 참하게 생긴 숙성회 세트와 삼합모둠한상을 주문했다. 언니들이 마실 생맥주 2잔과 함께. 저는 차가운 물 좀 주세요(잠시만요, 눈물 좀 닦을게요.).



이렇게 저렇게 카메라를 갖다 대도 영롱한 음식들이 나왔다. 반년만에 만난 우리들은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바삐 쏟아냈다.

"그런데 왜 맥주를 안 먹는 거야? 어디 아파?" 언니들보다 두세 배의 음주량을 자랑하던 내가 물만 먹고 있으니 이상해보일 수밖에. 촬영을 예약해 두었다고 하니 그럼 마치고 나서 만나자고 하지 그랬냐며 안타까워했다. 바디프로필 예약에 덧붙여 다시 등록한 러닝클래스와 새로 시작한 무에타이까지 얘기하니 언니들이 입을 모아 같이 묻는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며 두 언니가 하는 얘기는 이러했다. 45살 넘어가고 나니까 아주 맛있는 것도 아주 즐거운 것도 없다고. 이렇게 맛있는 걸 봐도 예전처럼 '와, 너무 맛있겠다!' 같은 것도 생각도 들지 않고, 예쁜 걸 봐도 예전 같은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삶의 낙이 없어진 느낌이라며.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걸까. 아니, 내가 열심히 사는 걸까. 열심히 산다는 건 뭘까. 나도 45살이 넘으면 언니들의 말처럼 내 일상들이 시들해지게 되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많아졌다.




열심 : 명사. 어떤 일에 온 정성을 다하여 골똘하게 힘씀. 또는 그런 마음.


국어사전의 정의대로라면 나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정성을 다해서 잘하기 위해 힘쓰니까. 그리고 내 주변에는 나와 삶을 대하는 자세가 비슷한 '열심히 사는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왜 그렇게 바쁘냐고, 힘들게 그런 걸 왜 하냐고 하는 대신 대단하다고, 오늘도 참 잘했다고 서로를 다독여준다. 그리고 그 기준에 나이는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 나이는 정말로 숫자에 불과하다.



언니들이 입모아 한 질문에 나는 음, 하고 3초쯤 생각하다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재미있어요, 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앞으로도 난 재미있는 재미있다고 느끼는 감도 높은 사람으로 살아야지, 45살이 넘어도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