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없다. 무언가를 절실히 빌어야 하는 때가 있으면 존재하는 모든 신들의 이름을 고루 불러가며 읍소한다. 살면서 큰 고난이 닥쳤을 때 종교가 있으면 의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아직 절실한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고난이 없었다는 반증인가. 그렇다면 감사할 일이다.
MBTI가 대한민국을 휩쓸기 전 사람들을 분류하고는 했던 혈액형도 믿지 않았다. 초등학교 5, 6학년즈음엔가 학교에서 혈액형 판정실험을 했었는데, A형인 줄 알고 살았던 내가 B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부터 '안소심'해지기 위해 노력을 했었던 것 같다. 소극적인 건 혈액형 때문이라고 믿었었는데, 혈액형은 다 거짓부렁이구나 하며 어린 나이에 깨달음 비슷한 것을 느꼈다.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했던 환경에서 자란 나는 스스로를 믿는 편이 가장 쉬웠다. '귀가 얇은' 스타일의 정반대라고 해야 하나. 이런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나는 점을 보러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라고 쓰고 싶지만 딱 한 번 신점을 잘 본다는 점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재능이 많은 아이의 장래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은 지인 가족과의 저녁 식사자리에서 용하다는 무당의 전화번호를 건네받았다. 부부가 다 병원에서 근무했는데, 몇 달을 기다려 소개받은 점집에 찾아갔더니 자리에 앉기도 전에 "딸 때문에 왔지? 의사 시켜."라고 했다나. 본인은 꼭 그러고픈 마음이 있었는데 너무 잘 맞춘다는 무당이 입도 떼기 전에 저렇게 말해주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서 항상 6개월치 예약이 밀려있는데 가끔 취소자리가 나오기도 하니 전화로 물어보라며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내일 당장 전화해 보겠노라며 번호를 소중하게 저장했다.
'난 나를 믿어'라며 오늘의 운세도 안 보던 나는 왜 그 번호를 받았을까. 그때의 나는 큰 아이에 관한 일로 매일을 수발드는 삶을 살고 있던 중이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던 아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 다니던 학원에서 피아노 전공을 준비해 볼 것을 제안받았고, 다방면으로 수소문하여 여러 조언과 경험담들을 들어본 후 결정을 내렸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가 남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것이 그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평범한 학생의 길을 지나온 나와 남편은 아이에게 어떤 조언도 해줄 수가 없었다. 짐작도 할 수 없는 길이었으므로. 다만 아이도, 나도 확신이 없었던 과정이었기에 우리는 앞도 보이지 않는 길을 매일을 헤쳐나갈 뿐이었다. 그러나 익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돈이 너무 많이 들었고, 거기다 아이는 그렇게 좋아하던 피아노와 매일 조금씩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보였다. 컨베이어 벨트에 태워진 아이와 우리 부부는 이게 맞는 건지 생각할 틈도 없이 어디론가 옮겨지는 느낌이었고, 모든 것이 모호한 이 상황은 나로 하여금 용하다는 무당의 전화번호를 받게 하기에 이르렀다.
몇 달이 걸려야 만나볼 수 있을 거라던 그분은 전화를 건지 일주일 만에 만나볼 수 있었다. 예약을 취소한 사람이 생겼다는 연락에 반차를 쓰고 가겠노라며 상담을 선점했다. 지하철을 한참 타고 찾아간 점집. 지도앱을 켜고 찾아갔지만 10분 동안 근처를 빙빙 돌다 겨우 찾아갔다. 과연 나에게도 무릎이 땅에 닿기도 전에 딸아이의 미래를 점지해 줄까 궁금했다.
지인이 얘기했던 것과는 뭔가 조금씩 달랐다. 속 시원하게 '그거 해, 그거 하지 마' 하는 얘기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큰 아이는 나라의 녹을 먹으며 누구를 가르치게 될 수가 있다는 정도로만 말해주었다. 선생님이 될 상이란 말인가. 그러면 뭐, 음악선생님인가 하고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썩 나쁘진 않겠네 하면서 나왔지만, 내 다음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 '나라의 녹이 어쩌고'하는 얘기를 또 해주는 것을 어쩌다 듣고는 레퍼토리인 건가 생각했다. 상대방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는 것이 그 사람이 영업을 하는 방법일지도. 반차가 아까워지는, 참 맑은 날이었다.
나는 왜 점을 보러 갔던 걸까. 혼자서는 도저히 결정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평 남짓한 연습실에서 하루에 7,8시간 가까이 피아노를 치며 매일 안색이 어두워져 갔던 큰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볼 생각은 않고, 내가 아이의 미래를 정하려는 크나큰 실수를 했다. 그 무렵 남편과 나는 '만 원짜리가 각티슈 휴지 같아'하며 자조적인 농담을 했다. 넉넉하지도 않은 맞벌이 가정에서 예체능 전공준비를 한다는 것은 말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했고, 온 가족의 지원과 희생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아마 그때의 나는 그 용하다는 무당이 나에게 '당장 때려치워!'라고 말해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모르는 척 전공하면 큰일 난다더라 하며 남의 입을 빌어 이제 그만하자고 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경희 : 고민이 있을 때는 혼자 해결하지 말아야 해? 나는 요즈음 혼자 많이 생각하거든.
주 여사: 혼자 고민하면 생각만 많아져. 경험이 많고 진실한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좋아. 그게 점쟁이보다 나아. 그리고 평생 의논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들어.
< 할머니의 좋은 점 > - 김경희 -
전에는 왜 점을 보러 가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됐었다. 하지만 그 경험 이후 나는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할 고민이 있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 용한 무당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집은 미신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상담소로서 그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보다는 나를 잘 아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고 느꼈다. 그들이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더욱 좋을터. 좋은 사람들을 주변에 둘 수 있는 그런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그 이후 점집을 다시 찾은 일은 없다. 큰 아이는 전공준비를 한 지 5개월 만에 빨리 그만두고 평범한 학생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질려버렸다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피아노를 요즘은 다시 즐겁게 치고 있다. 딸 덕분에 무당도 다 만나봤네 하며 가끔 우스갯소리도 한다. 아마 앞으로는 또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대신 시나브로 지혜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곁에 두고자 노력하고 있다. 고민이 생겼을 때 의논할 수 있는, 경험이 많고 진실한 소중한 사람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복비는 안 받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