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속을 부탁해

by 심바

지금은 Chat GPT나 제미나이와 유려한 티키타카로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알아낸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동네 카페가 정보의 주수입원이었다. 커피 마시는 카페 말고 인터넷 카페.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15년 전에 살던 동네에도 제법 큰 카페가 있었고, 꽤 까다로운 등업과정을 거쳐 거의 모든 정보를 볼 수 있는 유저가 될 수 있었다. 맛집에서부터 학원, 마트 세일정보까지 동네의 온갖 이야기들이 시시콜콜 올라오는 그곳은 흡사 사랑방과도 같았다.




활발히 운영되는 카페여서인지 회원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도 종종 생겼다. 주기적으로 평일 낮에 번개가 열리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가고 난 후 엄마들끼리 모여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는. 화려하게 올라오는 번개모임 게시글들을 보니 내심 부러웠다. 휴가를 내고 갈 수도 없다. 내 휴가는 이미 내 것이 아닌 2살짜리 아이 엄마의 신분상태였으므로. 모임글에 달린 댓글들 중에 나처럼 직장 때문에 못 가지만 너무 부럽다는 글들이 제법 있었다. 나는 무슨 용기에서였는지 글을 썼고, 순식간에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직장맘들도 모여봅시다!






평일 저녁시간, 직장 때문에 낮 번개모임을 가지 못해 아쉬워하던 카페회원들이 모였다. 맛집이 아닌 술집에서. 맛있는 안주를 종류별로 시키고는 마치 몇 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아이들 얘기에서부터 직장에서 힘든 얘기들까지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했다. 평범한 사무직이었던 나는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직장'의 종류가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인맥을 넓혀 물건을 판매하러 나온 분도 꽤 있었다.)


어쨌거나 평일 낮에는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다는 공통분모 하나만으로 빠르게 끈끈해진 우리들의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시댁 레퍼토리에 이르렀다. 그 시절의 나는 아들 손주를 원했던 시어머니의 막말 3단 콤보로 '시'금치도 안 먹겠노라 선언하고 다니곤 했다. 성별이 바뀔 수도 있을 거라는 소리를 듣고는 부른 배를 부여잡고 꺼이꺼이 울었던 이야기는 말할 때마다 명치끝이 아렸고, 늘 다른 이들의 안타까운 탄식을 불러왔다.


시어머니가 집에 올 때마다 냉장고를 뒤지며 "뭐 해 먹고 사니?"라고 한다는 어떤 회원의 이야기에는 모두가 입을 모아 절규했다. 그런데 테이블 끝에 앉아 마치 부처님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있던 결혼 15년 차 회원이 싱긋 웃으며 운을 뗐다.

"난 어머님이 옆집에 사시는데, 거의 매일 오시거든. 냉장고를 다 뒤지셔서 썩은 것도 버려주셔. 당연히 엄청 욕먹지. 그래도 그냥 고맙습니다 하고 웃어~!"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정답이 하나밖에 없는 문제의 답이 갑자기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 놀라움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화가 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된다고 했다.

욕을 하시든 뭘 하시든 결국 냉장고는 깨끗해진다나,

그것도 내 손길 하나 없이.


결혼 15년 차가 된 지금의 나는 이제야 그때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낯설고 날 서있던 관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무뎌지고 익숙해진다. 각자 잘 살면 그것이 서로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도 인정하게 되면서 굳이 필요 없는 미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누가 내 세계에 다녀간 흔적을 좋아하는 편이다. 도둑이 아니고서야 그 흔적들이 다정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를 하면 집 키를 제일 먼저 시어머니께 드린다. 그러면 퇴근 후 나란히 정렬된 국자와 뒤집개에서 시어머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아이 방 여기저기에 널려 있던 인형도 다 제자리를 찾아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내는 것이 뭔가 모를 안정감이 있다.

<정신과 박티팔 씨의 엉뚱하지만 도움이 되는 인간 관찰의 기술> - 박티팔 -

작가님은 시간이 흐르며 익숙해졌다기보다는 본디 성정이 그러하신 분인 것 같다. 그 부처님 같던 회원님은 집안일과 회사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본인의 안녕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일 테다.

어쨌든 결론은 같다.

내 손길이 닿지 않고도 정돈된 냉장고 혹은 아이의 방.


내 마음속 긴장의 끈을 조금만 느슨하게 해 준다면,

바짝 웅크리고 있는 마음의 힘을 조금만 빼준다면.

어쩌면 내가 싫어하는 어떤 일들은 어느 순간 아무런 무게도 없는 그냥 일상의 한 조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렇게 살면 내가 덜 힘들더라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알아간다.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