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온 Mar 15. 2024

일류와 삼류를 오르락 내리는 롤러코스터 같은 소설

<시인장의 살인> ●●◐

- 스포일러 없음 -

     

시작하기에 앞서, 존경하는 글벗 지뉴 작가님께 감사와 사과의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기한 없이 미루고 있던 이 시리즈의 리뷰 작성에 착수할 수 있게 숙제를 내주셔서 감사하고, 결과물 제출을 한참 지체해서 죄송스러워요. 충실한 감상을 위해 책을 꼼꼼히 다시 읽느라 늦었다고 변명해 봅니다. 이 기회에 세 번째 편까지 다 써서 올리려고요.

      

요즘 식으로 외치고 싶네요. Shout out to 지뉴 작가님!




이마무라 마사히로라는 작가가 있다. 일본 추리소설 계에 출현한 때는 2017년으로, 데뷔작이 각종 미스터리 순위에서 4관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마흔을 목전에 둔 85년생이며, 세계관이 이어지는 세 개의 본격 추리물을 발표했다. 마지막 작품의 결말로 미루어 보아 시리즈는 투 비 컨티뉴드다.

   

<시인의 살인>은 세 이야기 중 첫 번째이자 그 대단한 데뷔작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책이 각각 <마안의 살인>, <흉인의 살인>이니 제목에 건물이나 집과 관련된 한자가 하나씩 꼭 들어가 있다. 흥미로운 작명이지만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비슷한 뜻의 한자가 다 동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든다.


    

시인장의 ‘시인’은 음유시인할 때의 그 시인이 아니라 주검 시屍자를 쓴 시체인간이라는 뜻이다. 이 괴상한 단어조합에서 떠오르는 초자연적 존재가 있으니, 바로 좀비다. 좀비는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이다.

     

엄정한 논리를 추구하는 본격 추리소설에 논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괴물인 좀비를 등장시킨 것은 보통 대담한 시도가 아니다. 잘못하면 추리와 재미 양쪽을 모두 놓쳐버릴 수도 있다. 이마무라 마사히로는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 까다로운 과제를 경이로운 수준의 완성도로 수행한다. 작품의 트릭과 풀이는 눈이 부실 정도다.

     

그런데 왜 나는 동그라미를 고작 두 개 반만 매겼는가.


일류 추리소설을 삼류로 만든 어떤 것 때문이다.

     



장점부터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먼저 독자가 직면하게 되는 난제가 무엇인지 탐정의 입을 빌려 들어보자.

     

이건 침입 방법과 살해 방법, 두 가지 조건을 해결해야 하는 밀실 살인이에요.

    

용의자는 두 부류다. 인간과 좀비. 이중의 수수께끼가 여기서 발생한다. 한쪽에게는 침입 루트가 있지만 살인을 저지를 방도가 없다. 다른 한쪽은 살해 조건은 충족하나 침입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살인을 저지른 자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좀비인가?


이 문제의 해답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소설은 최고의 스펙터클과 재미를 선사한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는 또 있다. 좀비로 인한 물리적인 습격의 위험이다.

     

맨 처음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는 도면을 보면 알 수 있듯 ‘시인장’은 작은 빌라처럼 여러 층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최대한의 몰입을 위해 도면을 확인하며 읽는 것이 좋다. 매번 책장을 되넘기기 번거로우니 사진을 찍어놓고 수시로 확인하는 방법을 권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좀비는 점점 더 높은 층으로 섬뜩한 발걸음을 옮긴다. 마치 RPG 게임에서 이전 단계를 깨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듯 시시때때로 가까워지는 시인들의 위협은 엄청난 스릴을 선사한다. 금방이라도 창문 너머로 피로 칠갑이 된 손아귀가 뻗어올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그들의 역할은 공포감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초현실적 존재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철학적인 의미의 옷을 입는다.

     

이제 좀비는 단순히 공포나 잔학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무거운 죄업, 빈부 격차 및 약자와 강자의 존재, 우정과 가족애, 동료가 순식간에 적으로 돌변하는 비극성 등 다양한 요소를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됐어. 사람은 좀비에게 각자의 자아와 심상을 투영하는 거야.


사람의 애정 자체가, 좀비랑 똑같지. 놈들을 봐. 자신이 병에 걸린 줄도 모르잖아. 연애 감정도 똑같아. 전 세계 사람이 거기에 감염돼서 즐겁게 춤추고 있지. 나만 완전히 좀비가 되지 못한 거야.


     

지나치게 설교조로, 직접적으로 쓰인 것이 흠이긴 하지만 자칫 기계적인 문제풀이로만 흐를 수 있는 고전 추리물에 진지한 사유를 담으려 한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아무리 긍정적인 측면에 집중하려 해 봤자 하나의 거대한 하자가 그 모든 성과를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장단이 이렇게 극명한 소설은 처음이다.

     

다음 문장들을 읽으면서, 나는 스스로의 사상과 가치관을 몇 번이고 검열했다. 내가 지나치게 PC를 추구하는 걸까?


“사람을 들어 올리는 비결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더니 내 양쪽 겨드랑이 밑에 팔을 넣고 그대로 잡아당겨 일으키려고 한다. 하지만 OOO 씨는 몸집이 작으므로 당연히 힘이 모자란다.

(중략)

갑자기 내 등에 OOO 씨의 가슴이 밀착됐다.

OOO 씨! 아담한 몸에 히말라야 산봉우리를 숨기고 있었군요!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뭐하셨어요?”

그러자 OOO 씨는 얼굴을 붉히며 옷을 갈아입었다고 대답했다. (중략)

“속옷만 입고, 아니면 다 벗고 주무셨어요?”


     

다시 봐도 질 나쁜 대사들이다.  심지어 첫 번째 장면은 추리 측면에서 매우 크리티컬한 대목이다. 시체를 옮길 만큼의 힘이 없으니 여자는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자, 탐정이 직접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요령을 시연하며 주장의 맹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중대한 장면에서 히말라야 산봉우리라니. 이토록 저렴한 비유 부적절한 타이밍이라니.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이 맞는지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독자의 몰입을 와장창 깨버리는, 삼류 에로물스러운 독백이었다.

      

두 번째 인용문의 ‘다 벗고 주무셨냐’는 질문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전개 상 전혀 필요 없는 말이다. 백번 양보해서 시종일관 심각한 분위기의 소설에 약간 유머를 가미하고 싶었다고 쳐도, 그조차 완전히 실패다. 가벼움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해 소설의 격이 떨어져 버렸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보다 더한 흠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변태스럽다는 수준을 넘어 작가의 이성관과 평소 사고방식을 의심하게 만든 최악의 대사는 바로 이것이다.

     

“죄송해요. OOO 씨의 소중한 OO가 죽은 건 다 제 탓이에요. 사과한다고 용서될 일은 아니겠지만, 속죄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테니 바라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돈이든 몸이든.”


돈이든 몸이든?

작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대사를 대놓고 쓴 것인가?

     

상황은 이렇다. A라는 여자와 B 남자, C 남자가 있고, C 남자와 B 남자의 우정은 각별하다. 그런데 모종의 상황에서 C 남자가 A 여자를 보호하려다 목숨을 잃는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러 C를 구하지 못한 A는 귀중한 친구를 잃은 B 남자에게 극도의 미안함을 느껴, 돈이든 몸이든 주겠다고 제안한다.

     

대체 작가는 ‘상실’을 어떻게 생각했기에 이런 대사를 썼는지 모르겠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느끼는 인간적이고 순수한 슬픔을 저 두 가지로 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친구의 빈자리 제든 물질이나 성으로 대체 가능한 대상인가? 법적으로는 정신적 피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나 합의가 가능할지 몰라도, A는 분명 도의적인 입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걸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 알 수 있으니 문제다.

   

A와 B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 둘 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으며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언급은 없다. 연인 관계도, 어느 한쪽이 짝사랑하는 관계도 아니다. 그날 처음 만난 데다 서로 이성적인 호감을 느낀 적도 없다. 그런데도 대뜸 돈과 몸을 운운하다니. A의 죄책감을 아무리 강조해도 개연성이 턱없이 부족한 발언이다.

     

황당하게도 작가가 나서서 자기가 창조한 인물들을 깎아내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멀쩡한 대학생이자 정신건강한 남녀인 A와 B는 졸지에 돈이면 되는 줄 아는 사이코패스이자 왜곡된 성 인식의 소유자로 전락했다.

     

나는 출판사에서 왜 이 대목을 삭제하지 않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편집자들에게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믿기지 않는 일이다. 다른 일본 추리소설에서는 이런 질 낮은 대사들을 접해 본 적 없으니 그들 문화의 일면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아니나 다를까, 여러 독자들이 나와 유사한 결의 비판을 가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으로 갈수록 이런 저급한 묘사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차기작을 읽으면서 동일한 짜증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안 읽으면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솔직히 나는 그가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소설에 손을 안 댔을 자신이 없다. 그 복잡한 도면과 트릭, 물고 물리는 인과관계에서 오는 재미를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봐도 이마무라 마사히로는 기가 막히게 머리가 좋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정교한 가상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신경질이 날 정도의 결점을 상쇄할 정도로 비범한 능력을 자랑한다. 그러니 정당한 피드백을 수용하여 문제점을 개선한 것을 칭찬하고, 어서 차기작을 내놓으라고 닦달할 필요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단 책이 너무 예쁘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