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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Apr 21. 2024

○이비인후과

옛날 얘기

영유아들이 흔히 그렇듯 어렸을 적의 나도 툭하면 감기에 걸렸다. 엄마는 내가 콧물을 흘리거나 기침을 한다 싶으면 무조건 동네 ○이비인후과에 데리고 갔다.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걸리고 매번 많은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꽤 인기 있는 병원이었다.

    

그곳에 다니던 시절은 무조건 초등학생 때로, 그야말로 코흘리개 시절이지만 어찌나 자주 갔던지 병원의 인테리어와 구조, 진료실의 위치와 진료 기구의 배치까지 생생히 기억이 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대기 환자들을 위한 에메랄드색 소파들이 놓여 있었고 반대편 벽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받침대 위에 있거나 요즘 식으로 벽걸이로 걸려있지도 않았고 딱 필요한 크기만큼의 네모난 구멍이 벽에 뚫려 있어 TV가 쏙 들어가 앉아 있었다. 소파에 앉은 어른들은 지금 우리 집 거실에 있는 TV의 오분의 일보다도 작았던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하릴없이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거렸다. 텔레비전에서는 주로 전국노래자랑이나 복권 당첨 방송이 나왔고 잡지 표지에는 최진실이나 김희선, 김혜수 같은 탤런트들의 웃는 얼굴이 있었다.

     

한 번도 채널 선택권을 가져본 적이 없던 나는 데스크 뒤 간호사 선생님들의 분주한 움직임을 보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환자가 오면 간호사님은 정확하고 신속한 동작으로 서류가 빽빽하게 꽂혀 있는 뒤쪽 책장에서 차트를 찾아 꺼내 놓았다. 다른 간호사님은 진료를 마친 환자의 치료비를 수납하고 약봉지를 건넸고 또 다른 간호사님은 주사실에 들어가 주사를 놓았다.

     

나는 높다란 데스크로 가려진 아래쪽 공간, 간호사님들의 책상이나 서랍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무척 궁금했다. 그 밑에서 돈도, 종이도, 약도 다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병원에 다녀온 날이면 항상 블록으로 나만의 병원을 짓곤 했는데, 데스크를  가장 크게, 제일 먼저 만들었다. 그 장소만 있으면 나도 간호사님들처럼 근사한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직사각형 네모만 있는 블록으로는 데스크의 둥근 모서리를 흉내 낼 수 없었다. 엄마는 우리 남매가 더 이상 장난감으로 놀지 않는 나이가 될 때까지 딱 한 종류의 블록밖에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코블록’에 없던 세모 모양과 원기둥, 사람 모양 구성물들은 오직 상상력으로 메꿨다. 그러고는 뒷정리를 안 했다고 된통 혼나기 전에 쓰레받기를 가지고 와서 블록들을 가득 퍼 올려 통에 쏟아 넣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통 속에 쌓이는 내 벽돌들을 보며 내일은 더 멋진 병원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비인후과의 의사 선생님은 항상 짧게 깎은 새까만 머리에 둥근 거울이 달린 띠 같은 것을 끼고 계셨다. 선생님이 내 콧구멍에 가늘고 긴 쇠막대를 넣고 찌지직 빨아들일 때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같은 막대기로 칙칙 약을 쏴줄 때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빨아들이는 것 때문에 이비인후과에 가기 싫었다. 차라리 주사 맞는 게 덜 아팠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간호사 선생님의 안내를 따라 이상하게 생긴 기구 앞에 앉아 연기를 마실 때가 제일 좋았다. 그건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시원한 향이 났다. 연기를 맡으며 혹시 집에 가는 길에 엄마가 땅콩빵을 사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소망이 이뤄진 날은 거의 없었다. 딱 한 번 피부과에서 아주 아픈 치료를 끝낸 날 엄마가 노점에서 고소한 땅콩빵 한 봉지를 사주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흰 봉투를 손에 쥐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중학생이 되고 이사를 가면서 ○이비인후과에는 내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근방에 커다란 병원급 이비인후과가 생기면서 더더욱 갈 일이 없어졌다. 큰 병원엔 의사가 대여섯 명이나 있었고 진료실은 그보다 더 많았다. 그곳은 곧 대학병원을 제외하면 도시 전체에서 가장 번영하는 이비인후과가 되었다.

     

그러던 작년 어느 날, 큰 병원의 약을 먹고 너무 졸렸던 탓에 다른 병원에 가기로 마음먹은 일이 있었다. 옛날 우리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기에 금방 ○이비인후과가 떠올랐다. 다행히 3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병원은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한 곳에서만 그토록 오랫동안 영업을 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인테리어는 온 데 간 데 없고 온통 세련되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각 실과 비품, 기구들의 위치도 모조리 바뀌어서 같은 건물의 같은 공간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너무나 낯선 기분으로 대기실 의자에 앉아있자니 이 위치가 옛날 병원의 어느 지점이었을지 궁금해졌지만,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름이 불리고 진료실에 들어서니 의사 선생님이 계셨다. 같은 분이셨다. 어린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던, 한없이 어른이었던 그 선생님이었다. 다만 아직도 내 뇌리에 사진처럼 남아있는 검고 숱이 많던 머리카락은 자취를 감춘 모습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히 묻어나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자, 나는 옛날에는 그분도 매우 젊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기억 속 의사 선생님이 실제로는 30~40대의 한창나이였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변하지 않은 건 선생님의 머리를 에워싼 반사경, 오직 그것뿐이었다. 다른 병원에서는 머리반사경을 두르고 진찰하는 의사를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면 내게 그것은 ○이비인후과 선생님만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에 보고도 무심히 지나친 걸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차트 대신 모니터를 들여다보시더니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엄청 오랜만에 왔네. 나는 얌전히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와 똑같이 콧속에 식염수를 뿌리고 석션을 하셨다. 이 단순한 동작을 선생님은 평생에 걸쳐 대체 몇 번이나 해오셨을까. 최소한 수백만 번은 하셨을까. 지겹지도 않으실까.

     

처치가 끝난 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찬바람 쐬지 말고, 물 많이 마시고, 잠 많이 자고. 서른다섯이 넘은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만 하셨다. 불쾌하기는커녕 아늑한 기분이었다. 모니터는 내가 마지막으로 내원한 날짜가 최소 1999년 이전이라는 사실을 전달했을 것이다. 선생님 앞에서 나는 성인 환자가 아닌 잔뜩 긴장해 움츠러든 꼬마였다.

     

그때와 똑같이 간호사님의 안내를 받아 호흡기 치료 기구 앞에 앉았다. 그 연기도 다른 이비인후과에서는 들이마신 적이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다른 의사 분들은 한 번도 호흡기 치료를 권하지 않았다. 그날 맡은 냄새는 오래 전의 그것과 똑같았다. 여전히 그때의 방식을 고수하고 계셨다. 그러나 병원에서 약을 받을 수는 없었다. 혹시 기침 시럽이 있을까 기대했지만 병원에서 받아 든 약봉지엔 알약만 잔뜩 있었다. 엄마는 가루약과 시럽을 숟가락에 타서 내게 내밀곤 했었는데.

     

약국을 나서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그 길도 옛날부터 있던 길 그대로였지만 훨씬 좁아 보였다. 이렇게 지저분하고 낙후됐었던가. 어쩌면 그때보다 자동차가 압도적으로 많아지고 커져서일지도 모른다. 그 좁은 길은 상행과 하행으로 갈려 있었고 차들이 줄줄이 신호대기 중이었다. 분명 나도 차를 몰고 종종 다니는 길이었지만, 엄마 손잡고 걷던 시절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내가 운전면허를 따서 그 길에 차를 몰고 올 거라고는. 어른이 된다는 건 그만큼 멀고 먼 별나라 달나라 요술나라 이야기였다.

     

그 뒤로 다시 ○이비인후과에 가지는 않았다. 주차하기가 힘들어서였다. 그에 비해 대형병원 쪽은 언제 어느 때고 쉽게 주차가 가능했다.

    

그러나 내가 방문한 작년에도 ○이비인후과엔 환자가 많았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가끔 건물 앞을 지나치며 보게 되는 건재한 간판은 병원이 성업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맘카페의 병원 문의 글에 종종 추천 댓글도 달린다. 선생님이 경험이 많으시고 친절하시고 약도 잘 듣는다고.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인다. 두고두고 주민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으시는 것 같아 흐뭇하다. 기나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선생님의 의술과 환자들을 위하는 마음만은 변치 않으신 게 분명하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진료하셨으면 좋겠다.

     

이 담에 감기에 걸리면 오랜만에 ○이비인후과에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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