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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씩씩 Sep 19. 2024

익숙한 행복

다시 시작된, 사랑하는 나의 일상

  촉박한 일정 속에 급하게 짐을 챙겨 출국하느라 여행을 떠나듯, 두어 달 지낼 동안 필요한 짐만 챙기는 와중에도 밥솥은 꼭 챙기고 싶었다. 이민 가방 속에 소중한 쿠쿠를 챙기고, 그 속에는 더 소중한 커피잔을 두 세트 챙겨 넣었다. 중국에 와서 밥솥을 열고, 내솥에 넣은 커피잔의 안위를 확인하던 떨리는 순간. 꼼꼼하게 감싼 뾱뾱이를 벗기며 커피잔이 안전한 걸 확인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나랑 같이, 무사히 중국까지 와 주어 고마웠다.


  중국에 와서 안타까운 것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커피이다. 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답게 차를 파는 곳은 많은 것에 비해, 커피 전문점의 수는 압도적으로 적다. 스타벅스가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에 비해 커피 맛은 떨어지고, 이곳 물가에 비해 커피 가격은 비싼 편이라 선뜻 지갑이 열리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마트에서 파는 냉장 커피라도 사 마실까 싶어 기웃거려 보았는데 그 또한 쉽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메리카노면 충분한데 간혹 보이는 것들은 죄다 단맛이 첨가된 (값비싼) 커피뿐이었다.


  소중하게 챙겨 온 커피잔이 제 역할을 못하고 멀뚱히 놀기만 하는 사이, 출국 전날 중국으로 보냈던 택배가 도착했다. 택배 상자에서 가장 반가운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커피. 집에서 마시던 인스턴트 커피와 드립백 남은 것 몇 개를 챙겨 넣었는데 그게 정말 눈물 나게 반가웠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잔에 커피를 한 잔 내려, 내가 아는 맛의 초콜릿을 앞에 두고 앉으니 익숙한 행복이 눈앞에 펼쳐졌다. 돌아왔구나, 다시 시작되는구나, 내가 사랑하는 나의 일상이.



  성실하게 1일 1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커피 욕구가 해결되니 이제는 윤기가 차르르한 쌀밥이 그리웠다. 이곳에도 2-3인용 작은 전기밥솥에 흰쌀밥을 지어 밥솥 째 테이블에 내어주는 식당들이 있어서 쌀밥을 먹을 수 있긴 하지만 그곳에서 나의 쌀밥 욕구를 채울 수는 없었다. 윤기 없고 푸실푸실 하고, 그건 내가 원하는 밥이 아니었다. 임시 거처라 살림을 크게 늘리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집밥을 먹기로 결심했다.


  집에서 밥을 해 먹으려고 보니 생각보다 필요한 것이 많았다. 한국에서 아이들용 실리콘 식기와 깨지지 않는 그릇 몇 개, 수저 젓가락 몇 개 챙겨놓고 그릇이랑 밥솥 있으니 집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참으로 순진했다. 그간 얼마나 살림과 먼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집 요리사인 남편이 매일 같이 택배를 주문하고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칼과 도마, 냄비, 프라이팬, 각종 양념으로 시작해서 국자, 뒤집개, 채반, 스텐 볼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살림이 늘고 있다.


  헤르츠가 맞지 않는 밥솥을 사용하는 것이 처음에는 좀 불안했지만, 내가 원하는 윤기 가득한 흰쌀밥의 맛을 보니 불안함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남편이 열심히 검색해서 주문한 동북쌀 우창미와 쿠쿠의 콜라보는 한국 밥맛의 그리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나이가 들면서 고루하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인생의 큰 진리임을 깨닫는 순간들이 늘고 있다. 이를 테면, 유행가 가사에 나올 법한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가볍게 여겼던 ‘한 번뿐인 인생’과 같은 말이 실은 거역할 수 없는 엄청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납작 엎드린 마음으로 나의 오만함을 반성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요즘은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라는 말의 진의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낯설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필요한 것은 뭐든 다 있다. 차근차근 하나씩, 낯선 것들 속에서 익숙한 것들로 내 생활이 채워지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재미. 기쁨으로 마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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