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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퇴근 후의 서재 Apr 25. 2024

26년 전 결혼 이야기가 지금도 베스트셀러라는 모순

<모순> 양귀자

 내게 양귀자의 <모순>은 참 독특한 소설이었다. 많은 이들이 인생 책으로 꼽으며 추천하였지만 내용에 대해 들을 때마다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입을 통해 들은 줄거리는 8, 90년대 TV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에서 숱하게 다루었던 주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실제로 이 소설은 1998년에 발간되었다) 그럼에도 21세기의 젊은이들은 이 책이 대단하다며 엄지를 들었다. 그 평가를 증명하듯 이 책은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왜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다면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스물다섯을 맞은 안진진이 결혼을 목표로 두 남자를 두고 저울질하다가 한 명을 선택한다는 내용이다. 나영규와 김장우라는 두 인물은 과거에 흔한 선택의 기로처럼 여겨졌던 사랑과 현실을 대변하는 듯하다. 나영규라는 남자는 돈도 많고 주인공인 안진진을 만날 때면 모든 데이트 일정을 준비할 만큼 철두철미한 남자다. 하지만 안진진은 김장우에게 좀 더 끌린다. 돈도 없고 나영규에 비해 숱기도 적은 김장우는 감성적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남성이다. 이 두 사람과의 데이트를 번갈아가며 안진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여기에 좀 더 세부적인 인물 설정이 들어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안진진의 엄마와 그녀의 쌍둥이 이모일 것이다. 이 둘은 똑같은 외모를 하고 있지만 각기 다른 남자를 만나 다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며 안진진에게 애정도 갖는 이모와 남편을 잘못 만나 시장에서 힘들게 일을 하며 사는 엄마는 주인공의 선택에 참고사항이 되는 듯하다. 여기에 이모의 딸이자 주인공의 사촌이 등장하고, 조폭 두목이 꿈인 남동생과의 관계가 등장한다. 이 모든 인물들과의 에피소드들이 얽혀가며 안진진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신속한 전개와 챕터마다 궁금증을 유발하게 하는 마무리다. 양귀자라는 작가는 한국의 등단 소설가들이 보였던 세밀한 묘사 대신 빠르고 간결하며 명확한 문장을 선보인다. 이 점이 지금에도 대중에게 읽히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요즘 시대의 젊은 작가였다면 웹소설에서 크게 성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매 챕터마다 그다음을 궁금하게 만드는 마무리 솜씨는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작품의 기본 설정에서 드러나듯, 소설은 ‘현실’과 ‘사랑’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연애 이야기를 풀어나갔던 과거의 숱한 드라마들과 결과적으로 큰 차별점을 보여주지 못한다. 

 한때 여성의 결혼 적령기를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비유한 말이 유행한 적 있다.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25일이 지나면 팔리지 않는 것처럼, 여성은 스물넷이 가장 잘 나가고 스물다섯이면 마지막, 그 이후로는 늦어서 결혼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것은 실제로 우리 윗세대에서 숱하게 내뱉었던 농담 같은 진담이다. 스물다섯의 주인공이 결혼을 고민하고 있다는 설정에서부터 작가가 살아온 시대,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이 그려내는 시대가 지금과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이때는 마치 사랑과 현실이 양립할 수 없는 문제처럼,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항인 것처럼 떠들어댔었다. 


 게다가 작가는 쌍둥이 엄마와 이모를 내세워 이 둘의 삶을 비교함으로써 결혼이라는 선택의 문제가 인생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좀 더 극명히 보여주려 한다. 이 둘은 똑같이 4월 1일에 태어났고, 4월 1일에 결혼했다는 만우절 거짓말 같은 설정을 가져가는데, 이것은 분명 글을 읽는 과정에서 분명 흥미 요소로 작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2024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안다. 결혼적령기라는 것은 없으며, 결혼 앞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사랑과 돈의 양자택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MBTI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취향의 다양성과 성격의 다양성, 종교와 가치관의 다양성을 존중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결혼 앞에서 상대를 평가할 때 사랑과 돈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상의 것들을 고려한다.

 ‘사람’의 문제에서는 어떤 취미와 취향을 갖고 있고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를 생각한다. ‘돈’의 문제에서도 어디에 집을 구할 것이며 아이들은 어떻게 키울지, 돈을 어떻게 써가며 살지를 고려한다. 게다가 지금은 이 소설이 발간되던 때와 다르게 출산도 결혼도 선택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안진진처럼 스물다섯의 나이에 갑자기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며 어떤 남자를 선택할지 결혼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결국 이 소설은 네 가지의 결말이라는 선택지를 갖는다. 하지만 크게 보자면 주인공이 김장우를 선택하느냐 나영규를 선택하느냐일 것이다.


 솔직히 이 시대를 사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안진진이 누구를 선택하든 그 결혼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상징하는 나영규에게 안진진이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와의 데이트가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는데 무엇을 할 것인지 혼자 결정하고 그 시간표대로 해냈을 때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김장우는 안진진이라는 사람이 좀 더 주도적으로 개입될 여지가 있다. 안진진이 김장우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 부분이지, 사실 김장우의 취향이나 감성적인 면을 그녀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러니 주인공의 선택이 누구이든 그 결혼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이 관계에서 안진진이 고려하는 건 상대에 대한 평가일 뿐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냉철한 고민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쓰였던 90년대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한때 김영하 작가가 모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고전 소설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과거에는 결혼이 무척 어린 나이에 이루어졌고 자유로운 연애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전 로맨스 소설은 일종의 인생 시뮬레이션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미리 가늠할 수 있는 시험장이 소설이었고, 그것이 그 시대의 고전들이 갖는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순>이 발간되던 시기, 여성이 스물다섯이 되면 결혼의 압박을 받던 90년대에는 이런 소설이 읽히는 것이 당연했으리라. 


 하지만 21세기인 요즘에 이 책이 사랑받는 이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앞서 이 소설이 선택할 수 있는 결말이 총 4가지라고 했는데, 김장우 혹은 나영규를 선택하는 것 외에 둘 다 선택하지 않거나, 혹은 둘 다 선택하는 결말도 가능했다고 본다. 전자였다면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의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거고, 후자였다면 막장이지만 다른 의미로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그런 고민이 딱히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사실 이 소설은 곁가지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주인공의 남동생이 조폭 두목이 되고 싶어 하고 남성성을 앞세운다던가, 안진진이 김장우와의 데이트 중에 날 가두지 말라고 무섭다며 자신의 아버지처럼 말하는 장면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깊숙이 파고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1998년의 한국 사회는 아직 그런 통찰까지 수용하지 못했고, 작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다루는 엄마와 이모 사이의 ‘결정적 사건’과 주인공의 최종 선택에서도 작가가 어떤 가치관을 담아내기 위해 그려냈다기보다는 이런 이야기 설정이 뒤통수를 치는 반전의 재미를 주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왜냐하면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이 던지고자 했던 게 단순히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할래?라는 질문에 불과했다면 나는 여전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 이 소설은 2024년에도 읽히고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


 하나는 <모순>만큼 쉽고 재미있으며 명확하게 결혼과 연애에 대해 질문거리를 던지는 한국 소설이 21세기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 


 또 하나는 한국 사회가 결혼과 연애 앞에서 무엇을 고려해야 하고 어떤 선택해야 하는지 많은 소통을 보이지 못한다는 점. 


 후자의 경우 좀 더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특히 결혼이라는 문제에서 더욱 그런 것 같다. 한국인들이 한국인과 결혼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인생이란 대체로 비슷하다.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어디로 이사를 가고, 무슨 학원을 보내고. 결혼 후의 인생에 대해 한국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책이 발간되었던 1998년에 여성의 삶이 결혼 외에 상상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것처럼. 그 말은 이 사회가 다양한 삶의 형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결혼 앞에서 선택해야 하는, 고려해야 하는 문제들은 대체로 획일화된다.

 하지만 다양한 연애를 통해 우리는 관계에서 살펴봐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다. 결혼이 연애의 연장선이 되지 못하는 그 단절 지점에서 다양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는 만큼 다양한 선택에 대해서도 논의되지 못한 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순>이라는 소설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면 슬픈 일이다. 서른다섯에도 결혼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시대에 스물다섯에 결혼을 고민하는 소설을 들여다보고 있어야 한다니. 이 소설을 인생 책으로 꼽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게 <모순>은 질문을 던져준다는 것 외에 의의를 찾지 못하겠다. 그 질문도 결혼 앞에서 ‘현실’을 택해야 하느냐, ‘사랑’을 택해야 하느냐는 잘못된 이분법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영규가 ‘현실’인 것도 아니고, 김장우가 ‘사랑’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결혼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나는 어떤 사람이고, 그래서 어떤 상대와 만났을 때 조금 더 잘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26년 전 소설이 여전히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연애와 결혼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 시절에는 최선의 결과물이었을 이 소설이 내게 던져주는 유일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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