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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rdin BsBsVs Apr 18. 2023

따뜻한 이야기 한 스푼 #6

연탄 그 이름만으로도 인생은, 여전히 따뜻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연탄을 때고 살았다.

그 시절엔 대부분, 장작 아니면 연탄으로 난방을 했었다. 석유파동의 영향이 어떻게 미쳤는지, 나는 너무 어려 체감하지 못했지만, 연탄, 장작을 빼면 그 외는 구하기도 힘들고 비쌌던 시절이라.

어려운 시절, 누구나 간편하게 애용했던 게, 연탄 아니었겠는가? 손품만 들이면 구할 수 있는 장작을 사용하면 좋겠지만, 시골이 아닌 읍내 집엔 매일 나무하러 가기도 쉽지 않고, 나무장작을 쟁여 놓기도 마땅하지 않던 터라.  그 당시에 집 주변 주민들 또한, 대부분 연탄을 때고 난방을 해결했으니, 간편하고 인기가 많은 에너지였던 건 확실하다.

또한 공해만 빼면, 지금도 여전히 쓰이고 있는 착한 에너지라고나 할까?

그러기에 오랜 친구처럼 세월을 함께 보낸, 연탄에 대한 추억과 기억은, 머릿속에 이제 막 넣은 새 연탄불처럼, 여전히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다.

그 타오르는 추억을, 종이 위에  꺼내 놓으려 한다.


그 당시 내게 있어, 가장 귀찮았던 일 중 하나는 추운 겨울밤, 연탄불을 갈 때다.

연탄의 빠알간 불꽃은 추억처럼 타오른다.

연탄은 불관리를 잘해야 한다.

연탄아궁이에서 두 개의 연탄을, 위아래 이단으로 쌓아 놓고 연탄을 때게 되는데,

타는 연탄 두 개 중, 하나의 연탄이 모두 타서 꺼지기 전에, 하얗게 거의 다 타버린 연탄은 꺼내고, 아직 잘 타고 있는 연탄을 아래에 옮겨두고, 그 위 새파란 빛이 도는 새 연탄 하나를 올려주어 지속적으로 연탄이 꺼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의 연탄은 무조건 살려놓아야 한다.

둘 다, 꺼지면 방은 금세 식어버리고, 방안은 냉장고가 아닌 냉장고가 되어 추위에 떨어야 한다.

또한 불붙은 연탄 하나가 없다면, 적어도 하나의 새 연탄에 생으로 불을 붙여야 난방을 할 수 있으니,

불이 꺼지면, 연탄불 하나를 빌려 쓰던지, 새파란 새 연탄 하나에, 그 시절 귀하던 번개탄을 이용해서 연탄불을 새로 지피던지 해야 한다. 탄에 불을 붙이는 것은, 돈과 시간이 들고 매우 번거롭다.

그동안, 추위 속에 바들거려야 함은 물론이고….


그래서 대부분 탄불이 꺼지면, 염치 불고하고 이웃집에 연탄불을 빌리러 간다.

그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니까.

단, 연탄불을 얻어갈 때 예의 중 하나는, 얻어가는 연탄은  타고 있는 두 개의 연탄 중에 보다 많이 탄(늙어진) 연탄불로  얻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tip : 번개탄!!

요즘엔 캠핑에 숯불로 고기를 굽기 위해

불을 쉽게 붙일 때 사용하지만,  사실, 본래 주된 용도는 연탄에 빠르게 불이 옮겨 붙도록 하는 용도였다.

       불구멍!!

연탄 아궁이에 불구멍이 있는데, 불구멍을 열어놓는 크기에 따라. 연탄이 화력 있게 빨리 타게 하거나, 은은하게 오래 타도록 조절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연탄 교체 후 거의 반나절 가까이 견딜 수 있어. 자기 전에 탄을 갈고, 아침에 확인하고 갈았던, 기억이 있다.

새파란 빛이 도는,생 연탄(새 연탄)과 연탄집게가 보인다.

80년대 겨울, 어느 밤. 찬 바람이 따갑다.

어머니는 주방으로 나오셔서 연탄집게를 들었다.

세 사는 집, 제법 싹싹하고 애살있는 새댁 아주머니가, 연탄불을 빌리러 오신 거다.


주방, 남몰래 살림을 차린, 연탄 아궁이안 연탄커플.

안식처의 지붕과 같은 아궁이 뚜껑이 열리고, 떡볶이처럼 붉게 불타고 있는 연탄이, 포크와도 같은 어머니의 연탄집게 떡볶이처럼 깊게 찔려 집힌 , 들어 올려졌다.

떡볶이였다면 바닥에 피라도 몇 방울 흘렸겠지만,

그나마 떡볶이처럼 피를 흘리지는 않아 다행이다.


웬걸, 위아래가 붙어버려, 둘이 하나가 된 연탄은 어머님과 이웃집 새댁의 바람과는 다르게, 떨어질 줄 모른다.

열기를 뿜으며 이글거리는 몸통을 보니, 서로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

이웃집 새댁 아주머니는, 그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움츠린 채,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추위를 달래기 위함인지, 새댁의 방이 식을까 하는 조급함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붙어 있는 연탄에게, 어머니께서는 결혼을 반대하는 예비 신부 측 부모님처럼, 냉정하게 흔들어 보지만,

끈끈한 건 사랑뿐만 아니라.

연탄도 마찬가지인 거라.

“헤어지지 않아??” “헤어지지 못한단 말이지!!”

그리 그리 협박을 해도, 소용이 없다.


다시, 살살 타일러도 본다.

“자넨 나이가 많아!!”

주방의 흙으로 된 바닥이 닿을 정도로 연탄을 낮게 들고는, 시멘트로 된 주방 문턱에 아랫놈을 톡톡 부딪혀 본다. 흙바닥에 연탄이 떨어져도 깨지면 안 되니 말이다.


그래도 끈덕지게 안 떨어진다.

그때에는, 보다 강한 조치가 가해지게 된다.

연탄을 바닥에 내려 비스듬히 기울여 놓은 채,

다른 연탄집게로 아랫놈을 여러 번 매질한다.

사랑의 힘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맞아도 떨어지지 않았다.

연탄에 암컷, 수컷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끈질기게 앵기는거 보니, 분명 아랫놈의 성별은 수컷일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연탄이 아닌, 찰 거머리던지…

불쌍하지만, 항상 아랫놈만 맞는다.


 “요놈 봐라, 안 떨어지네!!”

그다음엔 늘 그렇듯 연장이 사용된다.

(불쌍하기도 하여라.)

어머님께서는 다 이가 나간, 쓸모없이 버려진 부엌칼 하나를 찾아들고 둘 사이를 갈라놓으신다.

살벌도 하지.. 칼부림이 났다.

연탄이나 사람이나

사랑 때문에 칼부림도 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결국, 둘은 떨어졌다.

떨어지는 순간, 가루 같은 불꽃이 주변에 튄다.

이내 그 불꽃은 힘없이 식어, 자취도 보이지 않는다.

첫사랑 이란 게, 이리 허무하단 말인가…

어머니가 들고 있는 연탄 아가씨는 파랗게 질린 채 나왔던 아궁이 속으로 다시들어 갔고, 그 위에 새 연탄이 놓여 졌다.

홀로 들려 올려진 연탄집게 끝엔, 그 이별의 고통의 시간과 아픔이라도 증명하겠다는 듯, 용광로의 쇳물처럼 무서울 정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더랬다.


주방 흙바닥에 망연자실, 하얗게 질린 채, 체념이라도 한 듯 누워있던 새치머리 노총각은, 셋집 새댁 아주머니 연탄집게에 붙들린 채, 선생님께 귀를 잡혀 끌려가는 학생처럼, 생 이별을 한다.


그 노총각 연탄은  또 다른 만남에, 또 다른 사랑으로, 새댁 아주머니네 아궁이에 신혼집을 두고, 알콩달콩 사랑하며 그 집 방안을 뜨겁게 댑이겠지?

가슴 아픈 첫사랑은 그렇게 잊혀지고.

전에 만났던 아가씨보다. 더 새파랗게 젊은 여성과

만나 축하와 축복 속에 결혼을 했으니.

늦었지만, 진정한 사랑을 만난 노총각이여

넌 횡재했다!!

하얗게 늙어 버린 연탄은 여전히 쓸쓸하다. 뒤에 자전거를 타는 처자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극과 극을 이루는, 요즘 세상사를 보는듯 하다.(23년 4월 어느곳.)

 탄불을 빌려줄 때뿐만 아니라,

연탄불을 갈기 위해 꺼냈을 때도, 연탄이 붙어있는 경우, 연탄을 무조건 떼어 내야 하기에, 많이 번거롭고 힘들었었다.

하지만, 어릴 적, 연탄을 떼어 내는 모습을 지켜볼 땐 마냥 재미있고, 또한 내가 이것저것 여러 방법으로 떼어 낼 때는, 뭔가 모를 스릴과 희열이 있었던 것 같다. 소소한 재미라고나 할까.

*연탄을 떼어 내다가, 살아있는 연탄을 깨면 죽도록 혼이 난다. 그러기에 스릴을 느끼며, 심혈을 기울 수밖에..


예전 우리 집 창고 벽 쪽, 연탄이 비어있는 자리마다,

일자에 가까워 보이는 직사각형 검은색 연탄 자욱이 선명했었다.

당장이라도 빈자리를 메꾸어 달라는 듯

편의점 점원에게 호소하듯 말이다.

연탄창고와 연탄집게, 연탄창고 벽에는 떠난 연탄들의 흔적이 남았다.

 이제 진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 때 짧은 웃음도 좋지만 진지함으로 삶에 대한 성찰이 절대 필요하다.

그것이 순간의 짧은 재미와 웃음으로 찾을 수 있는 행복보다, 더 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살이처럼 대책 없이, 생각 없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21세기가 되었는데도, 변함없이 연탄은 희망과 같은 존재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연탄에 의지하며 삶을 살아낸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추위를 벗어나게 하며, 생명을 돌보는 연탄은 존귀하다.

몸에 구멍이 없다면 얼마나 더 튼튼하겠느냐 마는,

연탄은 태어날 때부터 의도를 가지고 약하게, 약점을 가지고 하찮게(싼값에) 태어났다.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닌데 말이다.

그래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편하게 그를 찾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연약해 보이는

구멍이 있어야 잘 타고, 잘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온전히 자신을 태워 줄 수 있다는 거다.

연탄의 모든 몸은 온전히 살라져, 재로 남겨지지만

재가 되어도, 그 몸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이.

한겨울 얼어붙은 길가에 내동댕이 처진채 얻어맞고 발에 짓이겨, 가루가 돼서야.

그 쓰임이 다하는 것 아니었던가?

우리가 한겨울 빙판길에도, 미끄러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게, 그 희생 때문이 아닌가?


부활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낮은 우리 가운데 친히 찾아오셔,

수모와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낮은 곳에 인간으로 임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다.

마지막까지 우리가 세상을 넘어지지 않고 걷게

하시는 분.


자기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위하는 것,

몸을 불사르듯, 뜨겁고 헌신적인 사랑,

변함없이, 자신의 유익보다

사랑하는 이를 더 생각하는,

한결같은 끝없는 사랑 말이다.

난 여전히 내 안에, 그런 사랑을 꿈꾸고 그린다.

모든 분들이, 그런 사랑을 이루길 축복한다.


난 연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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