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시집간 첫 해까지만 아빠 제사를 지냈다. 큰 사위가 처음으로 참석한 기일에 거하게 제사상을 차리고는 앞으론 제사를 지내지 않겠노라 선포(?)했다. 그 후 우리는 미사로 제사를 대신한다.
일월 이십 구일.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두산순교성지에 가족들이 모였다.
오늘은 아빠의 기일이다.
『연미사 신OO 베드로』
*연미사:위령미사라고 함. 돌아가신 분을 위해 미사중에 기억함.
성당 입구 벽에 붙어 있는 아빠의 이름을 확인하고 오리새끼들 마냥 엄마를 쫓아 성당 안으로 쪼르륵 들어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성당 안에 들어와서 기도를 하고 있다. 모두 자신의 지향을 가지고 기도를 하러 왔겠지만 오늘만큼은 이 많은 사람 중에 한두 명쯤은 아빠를 위해 기도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휠체어를 탄 어르신과 그 뒤를 지키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분이 유난히 눈에 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미사가 시작되었지만, 나의 시선이 자꾸 그 어르신에게 꽂힌다.
‘우리 아빠도 살아있다면 저 나이쯤 됐을 텐데…’
아빠와 지낸 시간보다 아빠 없이 산 시간이 더 많은 딸.
아빠보다 더 오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딸.
아! 오늘만큼은 기도를 해야 하는데 신부님의 강론 사이로 잡념이 비집고 들어온다.
‘그날도 퇴근 후면 당연히 다시 집에 돌아올꺼라 생각하고 집을 나섰을텐데…’
‘누군가에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사고로 급하게 떠난 아빠. 아빠 없이 사는 것만 생각했지, 아빠의 마음을 생각해 볼 여유가 이제야 생긴 걸 보니 철부지였구나 하는 생각까지…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 따서 꿀껄꿀꺽 넘기며 상상 속의 인터뷰를 이어갔다.
“아빠 잘 지냈어?” - 우리 딸 오랜만이네. 잘 컸구나.
“거긴 어때? 편안해?” - 그럼 난 잘 지내. 엄마랑 동생도 잘 지내지? 보고 싶구나.
“나 엄마 된 거 알아?” - 내 딸이 벌써 그런 나이가 된거니? 참 기특하네.
“엄마 요즘 학교 다니는데, 이번에 우수반으로 들어갔어.” - 그래, 너희 엄마 원래 똑똑한 사람이야.
“혹시- 떠날 때 하고 싶은 말 있었어?” - 인사도 못하고 가서 정말 미안해. 그말 꼭 하고 싶었어. “엄마에게 전달 말 있어? - 정말 고생했다. 고마워. 나중에 만나면 내가 잘할께. 고맙다. 고맙다.
이젠 시간이 흘러 아빠가 없어 슬프다거나 눈물이 난다거나 하는 일은 별로없다. 하지만 문득문득 어떤 장면이 생각난다거나, '이럴때 아빠가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 하는 그리움이 있을 뿐이다. 훗날 아빠를 만나러 갈때 아빠를 보내던날 묘지 주변에 가득 피어있던 버들강아지 한다발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가야지. 그리고 소주 한 잔 나눠 마시며 아빠 없이 지낸 우리의 이야기 말고 우리 없이 지낸 아빠의 이야기를 실컷 들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