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도로스였다.
바다와 싸우며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그의 직업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는 늘 집을 비웠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순간에도 함께할 수 없었다. 행복을 담보 잡힌 채 항로를 겨냥하는 그의 모습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그를 망설였다.
“마음씨 좋고 화목한 가정의 장남”
이라고 선배가 소개했지만, 그의 직업은 여전히 행복한 가정의 걸림돌이었다.
그 이유는, 내가 환자로 만났던 젊은 여교사의 그림자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뇌출혈로 쓰러진 그녀 응급상황에도 남편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보호자 없는 빈 의자와 남편을 기다리는 그녀의 허전한 눈빛은 내 마음에 단단한 결심을 심었다.
결혼 상대가 ‘마도로스만 아니라면…’ 하는 마음은 그렇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 편견을 바꾸려 애썼지만, 결국 첫째 아이의 출산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그는 풍랑 이는 먼 항해에 올랐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행복한 신혼의 환상은 늘 유보됐다.
함께한 시간보다 바다를 사이에 둔 긴 기다림이 줄다리기하듯 우리 삶을 밀땅했다.
“엄마, 저기 하늘에 흰 눈이 내려요. 아빠가 비행기를 타고 우리 집으로 오고 있어요.”
한여름, 둘째에게 수유를 하던 중이었다.
비행기 소리가 들리자 딸아이는 베란다로 달려가 하늘을 가리켰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청양고추 하나를 깨물었을 때처럼 알싸하게 아려왔다.
딸이 아빠를 물을 때마다 나는 늘 말했다.
“아빠는 흰 눈이 내릴 때 비행기 타고 오실 거야.”
그랬다. 딸아이는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흥분된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나는 아이의 그 흥분된 목소리에 죄인처럼 속죄하게 만들었다.
아이들 앞에서 느끼는 미안함은 장마철 대나무처럼 치솟았고,
아빠와 함께한 유년의 아름다운 추억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점점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는 가족사진 속에서도 늘 부재중이다.
수십, 수백 번을 더 돌아오고도 남을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하늘조차도 그의 귀향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IMF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어느 날, 그는 귀국했다.
반가움도 잠시, 오랜 항해와 지독한 업무 스트레스가 그의 몸을 무너뜨렸다. 처음엔 그저 감기 몸살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방 병원에서 반년을 치료하다 서울의 대학병원으로 옮겼을 때는, 이미 의사들이 고개를 저었다. “젊은 나이라 전이와 재발이 더 빠르다”는 냉정한 진단으로 희망의 싹을 잘랐다.
삼 년 동안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더는 손쓸 수 없다”
는 퇴원 통보를 받았다. 차라리 전쟁터의 패잔병이라면 덜 허무했을까. 믿었던 현대 의학도, 희망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모든 걸 놓치고 허무하게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다.
맞벌이까지 하며 쌓아두었던 행복자금은 치료비와 교통비로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그는 점점 깊은 우울과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다. 호흡곤란으로 119를 부를 때마다, 좁디좁은 구급차 안에서 그의 손을 잡은 나의 떨림은 초조함과 두려움을 숨겨야 했다. 웽웽거리는 사이렌 소리는 지금도 내 가슴속을 울렁이게 한다.
산소통을 단 채 응급실을 오가는 날들이 이어졌고, 마침내 그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졌다. 고통을 줄여야 했던 시간은 점점 닳아갔고, 삶과 죽음 사이의 허무한 경계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한 많고 책임만 가득한 이 땅에서,
그는 결국 가족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채 떠났다.
그리고 그는 성당 묘지 한 평을
부동산인 양,
선물처럼 내 명의로 남겨줬다.
그가 가족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떠난 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그의 몫까지, 남은 삶을 버텨야 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마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희망이 있다는 증거’라며 나를 다그쳤다.
언젠가 그에게 돌아갈 땅을 두 발로 단단히 딛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
나는 엄마니까.
이제 일흔을 바라보며, 그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사십 년을 돌아본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기다림을 키워야 했던 십이 년,
질병과 함께 앓아야 했던 고통 속의 삼 년,
그리고 이승과 저승이 우리를 갈라놓은 지 이 십오 년….
나는 언제나 자욱한 기다림의 시간을 지폈다.
나의 행복은 언제나 미래에 담보 잡힌 채였다.
아이들이 장성한 지금은, 아이들의 행복한 유년을 남기지 못한
그의 몫까지 속죄하며 살아간다. 오늘도 내 방 벽면 사진 속에는,
그와 함께한 가족사진이 없다.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그와 함께할 가족사진을 가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