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문을 통과하지 못하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
손톱이 길다는 이유로, 머리카락이 길었다는 이유로,
운동화가 더럽다는 이유로—
교실로 들어가지 못했다.
어떻게든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고 뒤쪽 담장을 올랐지만,
체육 선생님께 들켜 쫓겨나는 꿈.
그 악몽은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 시작되었다.
결혼 후에도 그 꿈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교문 앞에 서면, 운동화 끈이 풀려있거나
가방 속 숙제가 사라지고
선도부 언니들은 여전히 나를 막아섰다.
억울함에 울다 깬 새벽, 베개는 늘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남편은 말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게.”
엄마의 죽음 이후, 이어가지 못한 학업의 상처를 그는 알고 있었다.
결혼 후 석사 과정을 망설이던 나를, 말없이 곁에서 지켜주었다.
그러나 남편이 떠난 뒤,
두 아이의 엄마이자 가장으로 살아가는 일은
거칠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삶을 반문하던 그때,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오직 배움에 대한 열정뿐이었다.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남편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기다림을 참아야 했던 시간,
질병과 싸워야 했던 시간,
그리고 결국 이별로 마무리된 시간들.
솜뭉치를 짊어지고 물속을 걷는 듯, 버거웠다.
직장과 가사, 두 아이의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과외까지 뛰었다.
시간도, 건강도, 마음까지 바닥났다.
그러다 문득,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버텨낼 의욕조차 사라졌다.
분명, 내 인생의 위기였다.
그때, 내 안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부를 해야겠어.”
그렇게 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실은 공부를 이어가기에 녹록지 않았지만,
육체가 고단함이 내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공부는 시들어가는 내 생명을 살려내는 일,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도 희망이 될 것을 믿었다.
망설이다가 석사 지도교수를 찾아가 내 뜻을 전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고개를 저으셨다.
“나이도 있고, 가정 형편도 어려운데…
이 길은 힘들 겁니다.”
직장 선배들도 만류했다.
“이제 와서 무슨 공부야. 지금도 충분히 벅찬데.”
그럼에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다시 교수님을 찾아갔지만, 대답은 같았다.
“지금은 학위를 받아도 교수되기 어렵습니다.
아이 둘 학비 대기도 벅찰 텐데, 왜 굳이 고생을 사서 하나요?”
연구실을 나서는 순간, 눈물이 왈칵 눈앞을 가렸다.
내가 원하는 건 교수 자리가 아니었다.
단지, 멈춰 선 내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필요했었는데...
그때 옆방의 교수님이 다가와 내 손을 꼭 잡았다.
붉어진 눈을 확인하시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요즘은 나이도 성별도 중요치 않아요.
특히 선생처럼 의지가 강한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셨다.
“지도교수님께서 끝까지 반대하신다면, 제가 지도할게요.”
그 한마디가 나를 절망에서 끌어올렸다.
가장 어려웠던 건 시부모님의 반대였다.
“아이 둘 학비도 버거운데,
남편도 돈도 없으면서 무슨 배짱으로 박사과정을 하겠다는 거냐.
네가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게냐?”
그 말씀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맞아요. 저는 남편도, 돈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공부를 하려는 겁니다.
제 아이들이 가난한 집안 환경과
아빠마저 없는 현실 때문에 기죽어
꿈을 펼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아이들의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방 안은 잠시 고요해졌다.
한참을 침묵하던 시아버님께서 눈시울을 붉히시며 천천히 말씀하셨다.
“너의 마음 자세가 장하구나.
헛바람 든 줄 알았더니, 네 속이 이렇게 단단할 줄이야.”
아버님은 장롱 서랍 속에서 구깃구깃한 지폐 뭉치를 꺼내셨다.
곰팡이 냄새가 밴 그 돈은, 내가 드린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두신 것이었다.
“이걸 장학금으로 써라.
아버지가 장한 내 며느리의 박사과정 첫 학기 등록금을 줄 테니…”
그 순간,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눈물이 차올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내 배움의 길은 비로소 열렸다.
박사과정은 내게 단순한 학위가 아니었다.
지킨 나의 삶을 일으켜 세우는 숨결이자,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찾는 여정이었다.
두 아이의 학비와 내 등록금까지 마련하려면,
직장 외에도 두세 개의 일을 더해야 했다.
밤새 논문을 읽고 졸린 눈으로 출근했지만,
이상하게도 매일매일 아침이 기다려졌다.
“나는 할 수 있다.”
그 자부심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
퇴근 후 과외를 하며 학생들과 마주했다.
“선생님, 왜 또 공부하세요?”
“나와 너희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서란다.
배움엔 끝이 없단다. 선생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니?”
아이들과 제자들은 내 모습을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엄마는, 우리 선생님은
나이가 많아도 박사 공부를 하시는 분이에요.”
그 말이 내게는 세상 어떤 위로보다 큰 응원이 되었다.
얼마 뒤 아들의 담임선생님께 들었다.
역사 시간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한 사람씩 말하라고 했을 때,
“저는 이 세상에서 저의 엄마를 가장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헛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의 고된 시간들이 눈처럼 녹아내렸다.
어린 시절, 엄마의 목소리가 나의 이정표였다면,
이제는 나의 배움이 아이들과 제자들의 이정표가 되었다.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희망의 표적.
그리고 마침내 학위를 받는 날, 나는 깨달았다.
‘좋은 엄마란, 부족함 없는 삶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박사과정이 끝난 뒤,
나는 더 이상 그 긴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배움은 단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었다.
잃었던 나를 다시 찾아가는 길,
무너진 나를 다시 세우는 회복의 여정이었다.
늦은 시작도 괜찮다.
닫힌 문도 다시 열릴 수 있다.
내가 그 증거다.
이제 나는,
그 문 앞에서 망설이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별빛처럼,
아이들의 길을 비추는 이정표로 서 있는 지금.
배움이 나를 다시 살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삶을 가꾸며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