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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속에서 춤추는 파편들

디스코 엘리시움과 바랄 수 없는 내일에 대하여

by 새솔

회색 도시의 잔해 위에서, 탐정은 누구인가


디스코 엘리시움(Disco Elysium)은 겉으로 보기에 전통적인 추리 게임의 외형을 취하고 있다. 기억 상실에 걸린 채 위스키 냄새를 풍기는 탐정, 벗겨진 페인트와 중고품이 즐비한 낡은 도시, 어딘가 판타지 같으면서도 지독히 현실적인 분위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이 전달하는 것은 단순한 사건 수사나 범인 검거의 쾌감이 아니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도처에 스며든 기묘한 '유령성(hauntology)'을 통해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우울과 현실의 공허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억을 잃은 탐정의 정체성은 애초부터 공중에 붕 떠 있다. 그는 내면의 목소리들,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자아의 조각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기 자신을 '재구성'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누군가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순간, 인간이 어떤 무의미한 단편들의 집합이 될 수 있는지를 체감하게 된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단편들은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며, 때로는 기묘하게 화해한다. 마치 현실을 찢고 나오는 유령적 존재들처럼, 디스코 엘리시움은 이러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으로부터 하나의 세계를 재현해낸다.


문화평론가 마크 피셔의 이론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적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 만들어낸 잔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세계는 이미 한 차례 혁명을 겪었고, 그 혁명은 처절하게 실패했다. 도시는 폐허처럼 놓여 있고, 시민들은 그 속에서 방황한다. 어제의 미래, 즉 '한때 가능했다고 믿었던 더 나은 내일'은 죽은 지 오래다. 이 삭막한 공간에서 플레이어는 허무와 멜랑콜리가 배어 있는 감각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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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유토피아의 잔해와 선명하지 않은 미래


디스코 엘리시움이 정교하게 그려내는 것은 혁명과 이상이 좌절된 사회의 모습이다. 온갖 무력감과 부채, 불신이 뒤섞인 가운데 무수한 스펙트럼의 정치적 입장들이 충돌하며 지적 장광설을 펼치지만, 실제로 변화하는 것은 거의 없다.


캐릭터들은 과거 한 시점에 존재했던 거대 담론의 잔재를 품고 있다. 좌파와 우파, 중도와 엘리트, 빈민으로 구분되는 이들의 목소리는 현대 사회의 각진 단면을 증폭시킨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마크 피셔가 그의 저서에서 "현재가 확장되면서 미래가 점차 사라진다"고 말했듯이, 디스코 엘리시움이 그리는 사회는 정확히 그런 '폐허의 시간성'을 보여준다.


한때 가능성이 넘쳤던 혁명적 미래는 이미 박제된 기억 혹은 지우고 싶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시간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기보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을 굴려 나간다. 그렇기에 이 게임에서 곧잘 등장하는 '디스코'라는 개념은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디스코는 1970년대의 분위기, 자유로운 춤과 쾌락, 혹은 부조리하지만 그 속에서 나름의 낙관과 희망이 공존하던 시절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게임의 배경에서는 그 디스코 문화조차 이미 잿빛으로 변해 있다. 한때 사람들이 춤추고 사랑하고 혁명을 꿈꿨던 디스코는 이제 아련한 그리움의 틀로만 남아 있다. 마치 마크 피셔가 '잃어버린 미래'를 논할 때처럼, 모든 음악과 문화가 과거를 재활용하는 '유령'으로만 자리하게 된 현실을 반영한다.


유령적 리얼리즘: 사라지지 못하는 것들의 암시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가 여기 있다"고 속삭이면서도 끝내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초현실적 요소들이다. 그것은 귀신일 수도 있고, 혹은 도시 자체가 품은 오류일 수도 있다. 존재하는 듯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듯 모호한 이 현상들은 한마디로 세계에 "스며들어 있는 유령성(hauntology)"을 드러낸다.


유령성은 사라져야 할 것들이 제대로 떠나지 못해 현재에도 진동을 일으키는 상태를 의미한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는 구체적 인물이든 사건이든, 과거의 잔재가 게임 속 모든 순간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던지는 초현실적 힌트들은 그 유령들이 아직 여기에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폭력적인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감, 그리고 이상과 환상이 섞이며 재생산되는 현대적 우울을 극적으로 증폭시킨다. 디스코 엘리시움이 채택한 독특한 대화 시스템, 심리적 특성과 통찰력이 자아내는 대사들은 끊임없는 내면 대화의 '메아리'를 구축한다.


저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들은 과거의 트라우마일 수도, 자본주의 시스템의 각종 유인책일 수도, 혹은 우리가 꿈꾸었던 어떤 아름다움의 해골일 수도 있다. 게임의 세계관은 현실을 토대로 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분열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시스템을 더욱 서늘하게 직시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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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파괴와 자아 서사의 균열


디스코 엘리시움에서 탐정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붙들고 있을 때, 플레이어는 수많은 선택지를 통해 이 캐릭터의 정체성을 재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지의 폭과 방향성은 사실상 무한하지 않다. 오히려 그 질문은 "나"가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로 변주되어 돌아온다.


자본의 질서가 이미 세계를 뒤덮고, 정치적 이념이 파편화되고, 모든 혁명이 끝나버린 듯한 시점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행위는 허무와 맞닿아 있다. 플레이어가 어떤 대사를 고르든, 그것은 탐정에게 '새로운' 자아를 부여하기보다는 기존의 상처를 재확인하거나 사회가 제공한 틀 안에서만 변주될 뿐이다.


결국 탐정은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이미 폐허가 된 도시 속에서 유령처럼 떠돌며 '조사'라는 명목으로 이 세계를 성찰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자유롭게 선택하는 주체'라는 환영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조건 속에서 제한되고 퇴색되는지를 상징한다.


꿈꿀 수 있는 미래가 사라진 사회에서 개인은 자기도 모르게 제도화된 내면을 수행한다. 탐정의 겉모습은 멋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 그는 자신이 지닌 음주벽이나 망각의 상처 속을 맴돌 뿐이며, 도시의 풍경 역시 그를 자유롭게 놔주지 않는다.


폐허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 웃음과 울음이 교차하는 지점


그럼에도 디스코 엘리시움은 '웃음'과 '풍자'를 잊지 않는다. 진지하고 암울한 디스토피아 한가운데서 서브컬처적 유머와 기괴한 말장난이 난무한다. 이것은 플레이어에게 서글픈 통찰을 안긴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은 우리의 절망조차 상품화하고, 우리 스스로가 우울을 즐기도록 만든다.


이 게임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통한 농담들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이게 웃긴가? 아니면 너무나도 슬픈가?"라는 모호한 지점에 서게 한다. 웃음과 눈물은 실제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 둘은 애초에 '현실을 직시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분열된 감정이기 때문이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내러티브가 주는 쓸쓸한 위트는 그 자체가 이 세계의 황량함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견디기 위해 마련된 방어 기제처럼 작동한다. 우리가 게임에 빠져드는 동안, 탐정의 흐릿한 정신세계와 도시의 구조적 모순은 한꺼번에 비극적 희극으로 변모한다. 이 기묘한 교차점에서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방향을 잃었는지 깨닫게 된다.


“미래는 없지만 게임은 계속된다”: 잃어버린 결말에 대한 소고


결말에 다다르면 디스코 엘리시움은 플레이어에게 한 편의 '수수께끼'를 남긴 채 마무리된다. 살인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어느 정도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정말 이것이 끝인가?"라는 의문이 부유한다. 정체성을 회복하는 듯하던 탐정도 결국 완전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도시 역시 혁명의 실패와 파편화된 정치의 고리를 여전히 품고 있다.


이 지점에서 디스코 엘리시움은 '무한 반복의 슬픈 순환'을 형상화한다. 어떤 사건이 해결되었다고 해도 근본적인 시스템이나 사람들의 무의미한 일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미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서 이야기는 완전히 닫히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이 '미래가 없음'을 인정하는 태도 자체가 게임의 엔딩보다도 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슬픔을 끌어안고 춤출 것인가


디스코 엘리시움은 표면적으로는 탐정 스토리를 빌려온 롤플레잉 게임이지만, 그 깊은 바닥을 살펴보면 개인과 사회의 균열, 자본주의의 유령, 사라진 혁명과 대안 없는 미래를 종합적으로 비추는 거대한 메타포가 된다. 이 게임은 부유하는 과거의 조각들을 발굴하고, 그로부터 자신을 새로 써내려가는 체험을 제시한다. 동시에 그 재구성이 얼마나 무력하고 절망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우울의 구조적 원인"을 해체하면서도, 우리가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숨 쉬고 생각하고 감정을 나누는지를 탐험한다. 플레이어는 탐정의 시선으로 이 도시를 뒤지고 진실을 맞닥뜨리며, 자주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눈물을 쥐어짜게 되는 순간을 마주한다. 그리고 결국 묻는다.


"이 허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춤출 것인가?"


그것이 바로 디스코 엘리시움이 남기는 질문이다. 우리의 현대적 병리, 개인의 무의미, 정치적 환멸, 사회적 파편화가 한데 얽힌 거대한 장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버둥치고 춤추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처한 '리얼리즘'의 감옥은 그 자체로 단단하지만, 동시에 그 균열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어떤 가능성—혹은 절망을 무기로 한 새로운 미학—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그 미묘한 틈새를 포착하고, 스스로를 되비추어 보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춤춰라, 어차피 너는 바닥을 칠 것이다"라는 듯한 부조리하면서도 강렬한 통찰을 전해준다.


그 슬픔을 안고 방황의 무대를 맴도는 사람들은 때때로 작은 불빛에 집중하며 발짓을 다시 옮긴다. 어둠 속에서 부서지는 디스코볼의 조각들처럼, 미래가 사라진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춤출 이유를 찾는다. 그것이 정답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디스코 엘리시움이 보여주듯 현실의 폐허 위에서도 몇몇은 여전히 노래를 틀고, 아무도 보지 않는 무대에서 몸을 흔드는 법이다.


그 광경은 이상하게도 자본주의 세계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가장 진실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결국 허무 속에서 춤추는 환영의 파편들은 우리에게 외친다.


"그러니, 잃어버린 미래를 다시금 상상해볼 의지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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