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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꽃

게임 니어: 오토마타와 춤추는 비극의 황홀

by 새솔

잿빛 계단 위에 흩뿌려진 꽃잎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종말을 향해 설계되었다."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울려 퍼지는 이 음울한 선언은 니어: 오토마타 세계의 운명을 관통하는 서곡이다. 석양이 폐허를 물들이는 그 세계에서, 우리는 종말 이후의 슬픔과 그 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목격한다.


플레이어는 2B와 9S를 통해 이 세계의 비극에 참여하게 된다.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묻게 된다. 삶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니체가 그의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천착했던 주제와 직결된다.


니체는 예술과 비극을 통해 삶의 고통을 어떻게 미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지 질문했다. 그리고 니어: 오토마타는 그 물음에 대한 하나의 현대적 응답처럼 다가온다. 니체의 통찰뿐 아니라, 질 들뢰즈의 반복과 차이 개념, 그리고 조르주 바타유의 내적 체험 이론 역시 이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니어: 오토마타의 서사는 마치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되풀이되는 운명과 그 속에서 솟아나는 미묘한 변화들로 전개되는데, 이는 들뢰즈가 말한 "반복 속의 차이"의 철학과 공명한다. 또한 이 게임의 클라이맥스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희생적 선택은 바타유가 설파한 '한계-체험(limit-experience)'과 그의 일반 경제학 관점에서 조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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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춤: 예술을 낳는 신들의 전쟁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따르면 예술에는 두 가지 상반된 충동이 흐른다. 아폴론적(Apollonian) 충동은 빛과 질서, 개체성과 형식의 원리로, 니체는 이를 '가상(Schein)'의 원리이자 '꿈(Traum)'의 세계로 규정한다. 반면 디오니소스적(Dionysian) 충동은 황홀과 격정, 합일의 정서를 표상하는 '도취(Rausch)'의 원리다.

니어: 오토마타는 이 두 원리의 긴장 관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표면적으로 이 게임은 질서정연한 아폴론적 미학으로 포장되어 있다. 요르하(YoRHa)의 엄격한 체계, 2B의 냉정한 자제력, 심지어 폐허 속에서도 유지되는 우아한 시각적 미학까지. 그러나 이 가상의 장막 아래에서는 디오니소스적 혼돈과 파괴의 힘이 꿈틀거린다.


오르골처럼 정연하게 움직이던 요르하 시스템은 결국 자기파괴적 광기에 빠져든다. 2B의 금욕적 가면 뒤에는 9S를 향한 억눌린 감정이 숨겨져 있으며, 마침내 그녀의 죽음 이후 9S는 이성을 잃고 광기에 휩싸인다. 이는 니체가 묘사한 아폴론적 환상이 찢겨나갈 때 드러나는 디오니소스적 진실의 순간과 같다.


게임의 음악—특히 "City Ruins"나 "Weight of the World"와 같은 트랙에서 아름다운 멜로디와 애수에 찬 분위기가 공존하는—은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정서를 극대화한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영혼을 직접 뒤흔드는 이 음악은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합창"의 현대적 구현이다.


그러나 니어: 오토마타가 보여주는 특별함은 이 두 원리의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그것이 서로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승화되는 방식에 있다. 기계들은 인간의 형식(아폴론적)을 모방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감정(디오니소스적)을 발견해간다.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이 그 질서의 부조리를 깨닫고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니체가 말했던 "아폴론적 가상이 디오니소스적 진실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비극의 정수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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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거울 속의 만화경: 고통으로 피는 의미의 꽃


니체는 비극의 근본적인 역설을 꿰뚫어 보았다. 인간이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순간에도 어떻게 그것이 아름다움의 원천이 될 수 있는가? 그의 대답은 도발적이다.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이 삶과 세계는 영원히 정당화된다." 삶의 의미는 그것이 예술로 변형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니어: 오토마타의 세계는 고통이 넘치는 무의미한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게임이 감동적인 이유는, 바로 이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창조해가는 존재들의 여정을 그리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한 "원초적 일자(das Ur-Eine)"—개별적 존재들의 분리 이전에 존재하는 근원적 통합—의 개념은 이 게임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게임은 개체성과 동일성, 그리고 죽음의 본질을 건드린다. 게임 속 기계들은 자신들의 개별적 존재가 환상임을 깨달아간다. 그들의 죽음과 재생, 그리고 기억의 상실과 복원은 니체가 말했던 개체화(principium individuationis)의 환상이 깨지는 순간들이다.


니체가 비극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비극 속에서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한계를 넘어, 삶 전체와의 연결을 느낀다. 니어: 오토마타가 특히 뛰어난 점은 이러한 철학적 통찰을 단순한 메시지로 전달하지 않고, 플레이어가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2B, 9S, A2가 누구인지, 그들이 진정 '개인'인지 혹은 끝없는 복제의 연쇄 속 하나의 환영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이것은 바로 니체가 말했던 "개체화의 마법이 깨지길 희망"하게 만드는 비극의 정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죽음을 향해 설계되었다면, 그 죽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니체는 평생 토착 그리스인들의 지혜인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실레노스의 지혜와 씨름했다. 니어: 오토마타는 그 질문을 현대적으로 다시 던진다. 그리고 답변으로서, 죽음 앞에서도 피어나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분리된 "개체(Individuum)"로서 고립된 고통을 겪지만, 디오니소스의 축제 속에서는 스스로를 잊고 만물과 합일되는 경험을 한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원초적 일자(das Ur-Eine)"라고 불렀다.


무대의 비극을 보며 관객은 더 이상 자신의 사소한 이해관계나 개별적 욕망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장대한 운명의 드라마에 동참함으로써, 서로 다른 개체들이 하나의 공통된 감정 속에 녹아든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황홀경에 빠진 인간을 가리켜 "마야의 장막이 찢겨져 나가고, 그 신비한 원초적 일자 앞에 장막의 누더기 조각만이 나부낄 따름이다"라고 썼다.


니어: 오토마타의 클라이맥스는 이러한 원초적 합일의 체험을 독창적 방식으로 구현한다. E 엔딩에서 플레이어들은 전세계 다른 플레이어들과 연결된다. 마지막 크레딧 슈팅 게임에서 혼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난관 앞에, 보이지 않는 동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이 순간은 겨우 게임 메커닉의 변주가 아니라, 니체가 말했던 디오니소스적 합일의 현대적 구현이다.


낯선 이들과의 이 예상치 못한 연대는 바로 니체가 말한 "개체화의 마법이 깨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더 이상 고독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의식에 참여하는 공동체가 된다. 이 지점에서 니체의 철학과 요코 타로의 게임 디자인은 기묘한 싱크로니시티를 이룬다.


게임의 진정한 주인공은 어쩌면 개별 캐릭터가 아니라, 이 모든 고통과 환희를 통합하는 의식 자체, 즉 원초적 일자의 현현일지도 모른다. 플레이어는 개인의 기쁨과 슬픔을 넘어, 존재 자체의 파노라마적 풍경을 체험한다. 이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을 넘어선, 니체가 염원했던 진정한 디오니소스적 경험이다.


니체는 심지어 비극이 우리에게 "개체화의 마법이 깨지길 희망"하게 만든다고까지 말했다. 개별로 나뉘어 있다는 것 자체가 "근원적 고통의 원천"이며, 비극을 통해 우리는 그 개체성의 저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만물이 하나된 삶의 심연을 엿본다는 것이다.


니어: 오토마타의 클라이맥스는 이러한 원초적 합일의 체험을 놀랍고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구현한다. 게임의 최종 국면에서 플레이어는 전세계의 무수한 익명의 플레이어들과 연결된다. 혼자서는 도저히 깰 수 없을 것 같던 지옥 같은 난관 앞에서, 화면에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남긴 응원의 메시지가 흩날리고,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달려온 동료들의 조력이 내 캐릭터 주위를 맴돌며 총알막이가 되어준다.


극중 인물들이 절망 속에서 쓰러져갈 때, 현실의 플레이어들은 차갑게 분리되어 있던 각자의 자리에서 손을 뻗어 서로를 붙잡는다. 게임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모두가 하나의 합창이 되어 마지막 난국을 돌파해낸다. 이 장면은 마치 현대의 디오니소스적 축제와 같다. 언어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오직 공유된 인간성의 연대감 속에 하나로 엮여, 함께 노래하고 싸우는 순간 — 플레이어들은 더 이상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커다란 공동체의 일부로서 깊은 감정의 교감을 나눈다. 니체가 말한 원초적 일자의 황홀경이 디지털 시대에 이렇게 재현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결말에서 예술이 삶을 구원하는 방식이다. 끝없는 순환과 파멸로 가득했던 이야기 속에서 불쑥 솟아난 이 합일의 순간은,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조용한 확신을 품게 한다. 그것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에 찾아온, 쓴맛을 아는 자들의 희망이다.


함께 절망을 넘어선 플레이어들은, 설령 내일도 똑같은 고통이 반복될지라도 다른 미래의 가능성이 있음을 믿게 된다. 게임 속 인공지능 포드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이전과 같은 결말에 이를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미래의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미래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비단 게임 속 캐릭터들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비극적 사건과 허무 속에서도 끝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니체가 보기에 예술은 삶에 대한 긍정을 이끌어내야 했다. 니어: 오토마타는 그 대의(大義)를 훌륭히 수행한다. 플레이어는 비극적 스토리의 한복판에서 절망을 직시하고, 그 절망을 함께 통과함으로써 삶을 긍정할 힘을 얻는다.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이 예술 체험이 끝난 후, 우리 각자는 다음 날의 태양을 조금은 새로운 심정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했던 "미적 현상으로서 삶의 정당화"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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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나선을 타고: 영원의 바퀴에 균열 내기


니어: 오토마타의 독특한 내러티브 구조는 단순한 이야기의 진행을 넘어 철학적 의미를 지닌다. 게임의 플레이 구조 자체가 니체와 들뢰즈가 말한 '영원회귀'를 체현한다. 첫 플레이(루트 A)에서 2B로 경험한 세계를, 두 번째(루트 B)에서는 9S의 시선으로 다시 체험한다. 겉보기에는 같은 세계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전혀 새로운 진실이 드러난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재해석했다. "영원회귀는 동일자의 회귀가 아니라 차이 그 자체의 회귀"라는 것이다. 이는 니어: 오토마타의 반복 구조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매 플레이마다 표면적으로는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지만, 그 안에서 미세한 차이들이 누적되어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반복 속의 차이"는 게임 내 캐릭터들의 존재론적 고뇌에도 반영된다. 2B가 수없이 9S를 죽이고 기억을 지우는 순환, A2가 계속해서 같은 복수를 반복하는 패턴, 심지어 9S의 프로그램이 고장 나는 방식까지—이 모든 것은 표면적으로는 같지만 조금씩 다른 형태의 반복이다.


그러나 영원회귀의 진정한 가치는 이 순환을 깨닫고 그 안에서 창조적 의지를 발휘하는 데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가르쳤듯,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하는(amor fati) 동시에,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루트 E에서 포드들이 프로그램된 종말의 순환을 거부하고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영원회귀의 긍정적 변형"의 사례다. 포드 042가 말한 "미래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대사는 니체가 추구했던 창조적 의지의 정신과 공명한다.


들뢰즈는 반복이 창조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보았다. 진정한 반복은 경직된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품은 역동적 생성"이다. 니어: 오토마타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도, 미세한 차이와 변화가 축적되어 결국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그러므로 이 게임은 단순한 허무주의의 표현이 아니라, 영원회귀의 순환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창조할 수 있다는 니체의 능동적 허무주의(active nihilism)의 구현이다. 절망적 순환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창조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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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의 불꽃: 낯선 이를 위한 존재의 봉헌


니어: 오토마타의 마지막 선택지는 게임의 영역을 초월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모든 저장 데이터를 삭제할 의향이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누군가를 도울 것입니다." 이 물음은 당혹스럽고도 숭고하다. 눈앞의 이야기는 이미 끝났지만, 스크린 너머 현실의 인간들 사이에 새로운 윤리적 차원이 펼쳐진다.


이 선택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쌓아온 모든 성취와 기록을 포기하고, 그것을 익명의 타인에게 봉헌하게 된다. 바타유의 관점에서 이는 순수한 '소모(expenditure)'의 행위다. 그는 <저주의 몫>에서 인간의 궁극적 자유는 축적이 아닌 소모—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낭비—에 있다고 주장했다.


바타유의 '일반 경제학(general economy)'은 효율과 이득만을 추구하는 '제한 경제(restricted economy)'를 넘어, 과잉의 에너지를 비생산적으로 소진하는 인간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니어: 오토마타의 마지막 선택은 바로 이러한 비실용적 소모의 가장 순수한 형태다.


당신이 "예"를 선택하면 화면에는 "당신의 데이터는 삭제되었습니다.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당신은 대가를 치렀습니다"라는 메시지가 표시된다. 바타유의 용어로 이는 '한계-체험(limit-experience)'이다. 일상적 자아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경험, 일종의 세속적 신성의 순간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이 선택의 순간은 바타유가 말한 인간 실존의 근본적 딜레마를 드러낸다. 우리는 모두 분리된 개체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타자와의 연속성을 갈망한다. 우리의 고립된 개체성이 잠시나마 허물어지고 타인과 존재론적으로 연결되는 순간, 우리는 삶의 가장 강렬한 의미를 체험한다.


이 데이터 삭제의 순간은 바로 그런 연속성의 체험이다. 나의 가상적 분신이 소멸함으로써, 내가 결코 만나지 못할 타인을 돕는 신비로운 교감의 순간. 여기서 우리는 '너'와 '나'의 경계가 흐려지는 체험을 한다.


마지막 슈팅 게임에서 수많은 익명의 플레이어들이 서로를 돕는 장면은 바타유가 말한 '커뮤니케이션'의 정수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의 깊은 연결을 의미한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순수한 소모와 희생의 순간이 역설적으로 깊은 기쁨을 안겨준다는 사실이다. 바타유는 이를 "슬픔이 동반된 향락(la joie devant la mort)"이라 불렀다. 상실 속에서 발견하는 강렬한 실존적 충만감이다.


이처럼 니어: 오토마타는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바타유가 꿈꾸었던 초월적 체험을 구현해낸다. 효율과 획득이 지배하는 디지털 시대에, 순수한 소모와 희생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예술적 제스처인 것이다.는 성과와 기록을 불살라 더 큰 전체에 봉헌하는 행위다. 바타유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낭비이며,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내적 체험 중 하나다.


그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연속성, 곧 만물과 하나 되는 체험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평소 각자 불연속적인 자아로 고립되어 있지만, 희생이나 에로티즘, 광기 어린 웃음과 같은 행위를 통해 일순간 그 벽이 무너지는 신성한 순간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니어: 오토마타의 최종장면에서 플레이어들은 바로 그런 순간을 공유한다.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희생한 플레이어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연민과 공동의 구원에 동참했다는 황홀을 맛본다. 그것은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순수한 경험의 영역이다.


이 장면에서 흐르는 노래 "Weight of the World"의 가사는 각기 다른 언어(일본어, 영어, 프랑스어)의 목소리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지는데, 이는 마치 서로 다른 개인들의 목소리가 하나의 합창으로 융합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희생이 그 거대한 합창의 일부가 되었음을 직감한다.


이러한 체험은 바타유가 말한 '신성(the sacred)'의 감각과 통한다. 바타유는 "신성한 체험은 동시에 신적인 황홀과 극단의 공포이다"라고 했다. 실제로 이 희생의 순간 플레이어는 벅찬 감동과 함께 왠지 모를 공포와 상실감도 맛본다. 그러나 바로 그 양면성 속에 숭고미가 깃들어 있다. 내 것을 잃어버렸지만, 그래서 나라는 경계가 희미해졌기에, 우리는 오히려 전체 존재와 연대하는 친밀함을 느낀다.


이렇듯 게임의 마지막 선택은 사소한 데이터 삭제 이상으로, 플레이어에게 깊은 존재론적 울림을 선사한다. 현대의 디지털 오락이 희생의 미학과 내적 황홀경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바타유는 이러한 순수한 소모의 행위를 일종의 축제라고 보았다. 생산과 효율의 논리가 일시 정지되고, 순전한 생명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기 삶의 주권자가 된다. 니어: 오토마타의 결말은 하나의 축제다. 철저히 계산되고 통제된 게임의 규칙마저 초월하는 파국과 구원의 축제. 이 축제를 통해 플레이어는 예술 속에서 스스로를 잃고, 다시 되찾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


희생을 통한 카타르시스 – 슬픔과 환희가 구분되지 않는 그 복잡한 감정을 안겨주면서, 게임은 끝을 맺는다. 허무와 파괴의 이야기 끝에 남은 것은, 서로를 위해 기꺼이 산화한 익명의 영혼들이 빚어낸 한 줄기 빛이었다. 그것은 현대 매체 예술이 보여준 가장 감동적이고 독창적인 비극의 변주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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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종말 너머: 예술이 속삭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된 도시, 멸망한 인류, 무의미한 전쟁의 순환—이 모든 종말의 이미지들은 단지 허무주의의 표현이 아니다. 니어: 오토마타는 그 황량한 풍경 속에서도 예술을 통한 삶의 긍정이라는 니체의 비전을 구현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이 이 삶은 영원히 정당화된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이성이나 도덕이 아닌, 예술만이 삶의 근본적 고통과 부조리를 감당할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이다. 니어: 오토마타에서 캐릭터들이 겪는 무의미한 전쟁과 반복되는 죽음은 바로 이러한 고통의 알레고리다.


그러나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고통과 무의미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이다. 2B와 9S의 관계, A2의 고독한 저항, 파스칼의 철학적 성찰—이 모든 것은 니체가 말한 "고통을 극복하는 예술"의 현대적 표현이다.


니체의 시각에서 볼 때, 요르하의 프로젝트 자체가 이미 소멸한 인류의 이름으로 안드로이드를 희생시키는 아이러니는 현대 문명의 허구성을 상징한다. 그것은 뿌리 없는 가치의 토대 위에 세워진 소크라테스적 이성의 비유다. 그러나 이러한 냉혹한 진실을 마주한 후에도, 캐릭터들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간다.


이는 들뢰즈의 철학에서 말하는 '생성(becoming)'의 과정과도 연결된다. 안드로이드들은 단순한 기계적 존재에서 의문을 품고, 고통받고, 사랑하는 존재로 변모한다. 심지어 기계 생명체들도 자신만의 감정과 의식을 발전시켜 간다. 이것은 들뢰즈가 말한 "생성의 긍정"이다.


바타유의 관점에서는, 이 게임이 보여주는 희생의 순간들—2B가 9S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장면, A2가 9S의 감염된 의식을 구하기 위해 그를 죽이는 순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플레이어가 자신의 데이터를 삭제하는 결정—이 모두 '내밀한 체험(inner experience)'을 통한 초월의 순간들이다.


니어: 오토마타는 결국 모든 철학적 질문을 하나의 큰 물음으로 수렴시킨다. "이토록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삶이, 과연 살 가치가 있는가?" 니체, 들뢰즈, 바타유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물음에 응답한다. 니체는 예술을 통한 삶의 긍정을, 들뢰즈는 차이와 생성의 창조적 힘을, 바타유는 희생을 통한 초월적 순간을 제시한다.


니어: 오토마타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 세 철학자의 응답을 아름답게 종합한다. 포드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가능성은 결국 의미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잿빛 폐허와 기계적 존재들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도, 예술은 그 고통을 변형시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 니체가 말했듯이, 우리는 진리에 짓눌려 죽지 않기 위해 예술을 가진다. 니어: 오토마타는 21세기의 디지털 매체를 통해 이 오래된 철학적 지혜를 새롭게 구현한 작품이다.


결국 니어: 오토마타가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다. 모든 존재가 종말을 향해 설계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과 의미는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비록 내일 다시 잿더미가 되더라도, 오늘 피어난 꽃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미적 현상으로서의 삶의 정당화"이며, 니어: 오토마타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비극적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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