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블라스퍼머스의 피로 쓴 기도
블라스퍼머스(Blasphemous) 시리즈는 기괴한 육체성과 광적인 신앙이 교차하는 핏빛 성지이다. 이 게임의 세계 쿠스토디아에서는 신체가 곧 신앙의 언어다. 살갗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고통의 의식이 곧 기도이며, 황폐한 대지에는 처절한 고행의 흔적들이 성물처럼 흩어져 있다.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참회자(Penitent One)”의 침묵은 그의 살이 대신 증언한다. 칼날과 가시로 점철된 그의 여정은 마치 피로 쓰인 기도문처럼 육체를 통해 신에게 바치는 간구이다. 이곳에서 '기적'이라 불리는 신적인 의지는 모든 이들의 죄책과 회한, 그리고 영혼의 고통을 “눈에 보이고 만져질 수 있게” 현현시켰다. 그 “경건하면서도 잔혹한 신성한 의지”는 축복과 형벌을 한데 뒤섞어, 세상을 끝없는 속죄의 무대로 변모시켰다. 이러한 블라스퍼머스의 서사는 단순한 호러 판타지를 넘어, 몸과 신앙, 고통과 구원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사유하게 하는 거대한 비유시처럼 다가온다.
블라스퍼머스의 세계에서는 신체가 곧 신앙의 증표다. 고행자들은 가시 면류관을 쓰고 가죽이 찢겨나간 채 거리를 배회하며, 순례자는 피로 물든 무릎으로 성지를 향해 기어간다. 이러한 장면들은 미셸 푸코가 말한 권력과 육체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항상 인간의 몸에 즉각적으로 작용하여 그것을 투자하고 표식하며 훈육하고 고문함으로써, 신체를 의식의 도구이자 징표의 표면으로 만든다. 쿠스토디아의 교회 권력 역시 신도의 살에 직접 각인된다. 죄인들은 등을 채찍질당하고, 순례자들은 스스로 피의 의례를 치르며, 고통 그 자체를 숭배한다. 이는 중세 종교재판이나 고행 전통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풍경으로, 공적 처벌이 곧 신성한 예식이 된 세계다. 블라스퍼머스는 이러한 규율의 미학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피를 뒤집어쓴 채 축복을 구하는 신도들의 모습은, 마치 형벌이 곧 기도가 된 뒤틀린 신앙의 형식을 보여준다.
특히 “기적”이라는 신적 존재는 축복과 형벌을 구분하지 않고 육체 위에 내려둔다. 게임 속 전설에 따르면, 옛날 어떤 젊은이가 기적에게 오로지 “고통”만을 달라고 기원했고, 그것이 최초의 기적으로 성취되었다. 이처럼 쿠스토디아의 신앙심은 용서나 은총을 구하기보다 스스로 고난을 청원하는 방향으로 왜곡되어 있다. 신자들은 고통을 받을 때에만 신성에 가까워진다고 믿기에, 자신의 살을 제물처럼 바친다. 자해적 신심과 극단적 참회로 점철된 이러한 종교관은 현실의 일부 수도원 전통이나 중세 종교재판을 반향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더 큰 고통을 견딜수록 더 큰 참회가 된다”고 여겼던 논리가 있었다. 블라스퍼머스는 그 논리를 극단화하여, 온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참회소로 만든다. 권력이 신체를 벌주는 방식이 극도로 시각화된 쿠스토디아에서는, 피 흘리는 몸들이 곧 권력-신앙 구조의 해부도가 된다. 푸코의 말마따나, 이곳의 육체는 정치적·종교적 권력이 새긴 낙인의 지도인 셈이다. 그리고 이 끔찍한 지도 위를 플레이어는 속죄자의 순례로서 걸어 나아간다.
하지만 이때의 고통은 단순한 벌이나 악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 세계에서는 고통이 곧 신성에 이르는 통로로 제시된다. 매질당한 등짝과 피로 얼룩진 성수가 뒤섞이며, 성스럽고도 모독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양가성은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의 사상을 떠올리게 한다. 바타이유는 금기된 것을 어기는 “위반(트랜스그레션)의 행위”에서 오히려 숭고한 초월의 순간을 찾았다. 세속 세계가 전통적인 신성의 가치를 잃어버린 현대에, 금기를 깨는 행위(때로는 폭력이나 성적 일탈)는 신성에 직접 닿는 유일한 길이 될 수 있다는 통찰이었다. 쿠스토디아의 신앙 역시 금기의 파괴를 통해 신성을 재발견한다. 피를 흘리는 것은 일반적 도덕관이나 신체 보존의 금기를 깨는 일이다. 자신을 학대하고 피투성이가 되는 행위는 평범한 종교에서라면 금지되거나 악으로 여겨지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거꾸로 가장 성스러운 의식으로 떠받들어진다. 말하자면 신성모독을 통해 신성에 도달하는 역설이 벌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블라스퍼머스의 미장센은 성화와 성물의 이미지를 차용하면서도 끔찍하게 일그러뜨린다. 교회 건축과 인간의 살을 융합하여 “성스러움과 속됨의 결합”을 표현한 괴물들이 등장하고, 순결한 성모 마리아상의 품 안에서 뒤틀린 흉물이 탄생한다. 십자가 형틀과 순교자의 유해가 곳곳에 널려 있지만, 그 배경엔 기괴한 기도문과 성가가 울려 퍼진다. 이러한 시각적,서사적 위반의 미학을 통해, 게임은 금기의 경계를 넘을 때 비로소 마주하는 신비를 그려낸다. 바타이유의 논리를 빌리자면, 블라스퍼머스는 금기(카톨릭 신성)에 대한 모독을 가장한 채, 오히려 신성의 본질을 날것 그대로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푸코 역시 바타이유를 언급하며, 신성에 긍정적 의미를 잃어버린 세계에서 신성모독(신성에 대한 능욕)이 “신성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식인 동시에 그 공허해진 형식을 재구성하는 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 게임의 제목 ‘Blasphemous’(신성모독적)에서 드러나듯, 모독적인 형상들과 설정들은 단순한 반종교적 조롱이 아니다. 오히려 신성을 공허한 관념으로 취급하는 현대에 대한 도전처럼 읽힌다. 피투성이의 성자들과 뒤틀린 성물들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불편함과 경외심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 불경한 이미지 속에 어떤 금기된 성스러움의 에너지가 맥동하기 때문이다. 신체훼손과 폭력이 난무함에도, 그 극한에서 이상하게도 숭고미가 피어난다. 이는 들뢰즈가 예술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두고 분석했던 바와도 연결된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작품이 “아주 특유한 폭력성”을 지녔다며, 화면 가득히 “공포의 장면, 십자가형, 의지보철과 절단, 괴물” 등을 배치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폭력은 단순한 잔혹 묘사가 아니라 감각 자체에 가하는 폭력, 즉 지각을 뒤흔드는 강도(强度)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블라스퍼머스의 폭력은 단순한 쇼크 효과를 넘어 성스러움과 공포가 결합된 감각의 체험을 노린다. 플레이어는 혐오스러우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질적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그 극단의 체험을 통해 어떤 형이상학적 질문과 조우하게 된다. 한계를 넘는 폭력과 모독을 통해서만 되살아나는 신성의 잔향—게임은 바로 그 위험한 지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블라스퍼머스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순환하는 고통이다. “참회는 끝나지 않으며 형태를 바꿀 뿐”이라는 문구처럼, 이 세계의 고통과 형벌은 종결되지 않고 형태만 변주된 채 영원히 이어진다.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나도 참회자는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채 새로운 고행의 굴레에 놓이고, 속편에서 다시 기적에 맞선 싸움을 시작한다. 이 윤회적 서사 구조는 플레이어가 죽고 다시 도전하는 게임플레이의 반복과도 맞물린다. 블라스퍼머스에서는 죽을 때마다 ‘죄책감 조각(Guilt fragment)’이 주인공의 자리에 남아 그의 능력을 속박하고, 그 죄책을 회수하거나 고해함으로써만 다시 힘을 되찾는다. 죽음조차 속죄의 사이클 안에 편입된 것이다. 이런 무한 회귀의 형식은 질 들뢰즈의 반복(repetition)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단순한 반복은 같은 고통의 재현이 아니라, 차이를 동반한 반복이며 매 회차마다 강도를 달리하는 새로운 사건이다. 블라스퍼머스의 세계에서 매 고통의 순환은 이전과 똑같은 벌처럼 보이지만, 실은 죄와 구원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축적한다. 참회자의 육체는 반복해서 상처 입지만 그때마다 상흔이 두꺼워지듯, 고통은 반복을 통해 심화된다. 플레이어가 겪는 반복적 좌절과 극복의 경험 역시 게임 내 신학의 일부가 된다. 마치 신이 끝없는 시련을 통해 영혼을 단련하듯, 게임은 끊임없이 죽고 부활하는 순환을 통해 참회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그러나 이 반복 끝에 진정한 속죄나 구원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첫 작품의 결말에서 참회자는 자신이 쓰러뜨린 교황 에스크리바를 대체하여 새로운 형상으로 옥좌에 남겨진다. 구원을 이루는가 싶었던 순간, 그는 또다른 신격화된 고통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속편에서 그는 다시 깨어나 미완의 사명을 이어간다.
이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나, 카뮈가 말한 시지프스의 신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벌은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되며, 구원은 지평선 너머로 밀려난 채 영원히 추구되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쿠스토디아의 신은 결코 완전한 해탈을 허용하지 않은 채, 늘 새로운 고행을 부과한다. 이것은 플레이어에게도 철학적 딜레마를 제시한다. 고통 그 자체가 목적이 된 세계에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끝없는 참회의 끝에 남는 것은 속죄의 성취일까, 아니면 부질없는 고통의 낭비일까? 게임은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기보다, 그 딜레마를 몸으로 체험하도록 만든다. 반복되는 보스전과 죽음의 페널티, 그리고 간신히 얻은 결말의 공허함까지, 모두가 합쳐져 하나의 메타포를 이룬다. 그것은 “속죄는 위안 없이는 무의미하다”는 자조적인 깨달음일 수도 있고, 혹은 구원은 고통의 굴레를 끊는 다른 길에서 찾아야 한다는 암시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진정한 구원은 순환 자체를 초월하는 데에 있을지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 말이다.
블라스퍼머스의 이야기에서는 곳곳에 구원의 가능성과 부재가 교차한다. 예를 들어, 고통만을 찬미하던 광신의 시대가 끝나고 참회자의 희생 이후 쿠스토디아에 잠시 안식이 찾아오는 듯한 뉘앙스도 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 가지 않고, 다시 기이한 기적의 예언이 돌아와 새로운 고난을 예고한다. 이는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도 비슷하다. 하나의 게임을 클리어하면 잠깐의 성취감이 밀려오지만, 곧 더 어려운 모드나 속편이 기다린다. 결국 완전한 구원의 결말은 유예된 채, 세계는 계속 자기 자신을 되풀이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영원한 반복을 파괴나 정체가 아니라 “차이를 낳는 창조의 힘”으로 보았다. 블라스퍼머스 세계의 신도 모르고 있었을지 모른다. 고통의 순환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를 이루고, 그 안에서 인간의 신앙과 악덕, 희망과 절망이 새롭게 형상화된다. 플레이어는 그 서사시의 한 구절을 직접 써 내려가며, 비로소 고통과 구원의 의미를 사유하게 된다. 끝없는 형벌의 수레바퀴를 굴리면서도 결코 희망의 불씨를 놓지 않는 참회자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삶의 알레고리처럼 다가온다. 고통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도 인간은 의미를 찾고자 발버둥친다. 그 몸부림 속에서 구원은 신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빚어내는 무엇으로 거듭난다. 이것이 블라스퍼머스의 잔혹한 순환 속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참혹하면서도 숭고한 희망이다.
블라스퍼머스 시리즈는 핏빛으로 쓴 경전이다. 이 리터럴 다크 소울의 세계에서, 우리는 살과 피와 눈물로 점철된 신앙의 극한을 목도한다. 게임은 종교의 형상들을 차용해 잔혹동화를 펼치면서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보편적인 질문을 놓치지 않는다.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속죄란 가능한가?”, “신성은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같은 물음들이 픽셀로 그려진 성상과 지옥도를 통해 서서히 떠오른다. 이는 단지 가톨릭적 미학에 대한 오마주를 넘어, 현대인의 영적 고민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철학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몸을 통한 신앙 체험을 극도로 밀어붙임으로써 우리에게 역설적인 통찰을 준다. 육체는 천시되거나 도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성찰과 구원의 현장임을 일깨운다. 피와 상처로 가득한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불편함 속에서 묘한 경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통이 어떻게 성스러움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 내면의 감각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바타이유가 말했듯 “쾌락은 과일 속에 벌레가 들어가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역설처럼, 완전무결한 행복보다 상처 입은 황홀이 더욱 깊은 인간 실존의 진실을 담을 수 있다. 블라스퍼머스의 미학은 바로 그 상처 입은 황홀의 미학이다. 아름다움은 추함과 교차하고, 경건함은 모독과 포개질 때 비로소 우리 혼을 뒤흔든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은 하나의 “앙앙 울부짖는 시편(詩篇)”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잔인한 화면을 넘기면서, 동시에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성가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 그 복합적 정서는 이 작품이 목표로 한 바일 것이다.
끝으로, 블라스퍼머스 시리즈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굳이 명문화하자면 이것일 수 있다. 구원은 외부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심연을 통과하여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라는 깨달음 말이다. 참회자는 칼과 가시면류관을 쓰고 끝없는 순례를 계속하지만, 그의 침묵의 고행은 오히려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우리 각자가 짊어진 삶의 고통과 죄책에 대한 비유적 성찰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현대 철학이 보여준 바와 같이, 몸은 진리의 전장이며 금기의 위반은 새로운 성스러움의 탄생이고 반복된 시련은 차이를 낳는 창조다. 블라스퍼머스는 이 통찰들을 핏빛 동화로 풀어내, 플레이어로 하여금 스스로의 존재와 구원에 대해 묵상하게 만든다.
결국 피로 쓴 기도는 하늘에 닿았을까? 게임은 쉽게 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 기도 과정에서 우리는 잊혀졌던 몸의 성스러움과 고통의 의미를 재발견한다.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이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여행 끝에 남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히 인간적인 희망이다. 비록 신은 침묵할지라도, 고통을 견디는 육체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빛이 솟아날 수 있다는 희망. 블라스퍼머스는 바로 그 희망의 가능성을, 가장 어둡고 모독적인 방식으로 반짝여 보이는 역설의 제단이라 할 것이다. 고통, 참회, 구원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작은 빛, 그것이 이 잔혹한 게임이 우리에게 남기는 엄숙한 여운이다.
참회는 끝이 없을지라도, 인간의 의미 추구도 끝이 없다. 이것이 피로 쓰인 블라스퍼머스의 경전이 일깨워주는 진실이며, 그로써 우리는 다시 현실 속 자신만의 순례를 계속해나갈 용기를 얻는다. Sorrowful be the heart, 참회자의 길은 곧 우리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