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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숨쉬는 세계와 빛이 잃어버린 진실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

by 새솔


벨 에포크의 저무는 빛 아래, 어떤 섬에서는 해마다 한 번씩 죽음이 도래한다. 거대한 거석(모놀리스)위에 페인트리스의 손이 숫자 하나를 새기면, 그 나이에 해당하는 모든 이가 소멸한다. 생일 축하는 곧 카운트다운이 되고, 나이는 생의 축적이 아니라 죽음을 향한 계단이 된다. <클레르 옵스퀴르: 33원정대>는 이 기묘한 의식, 고마주(Gommage)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페인트리스의 붓끝에서 태어나고 지워지는 세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상실의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현실과 허상의 경계에서 비틀거리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숫자가 삶을 정하는 세계


고마주는 단순한 죽음의 예고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 자체를 덧칠하고, 다시 긁어내는 행위다. 페인트리스가 모놀리스에 숫자를 그리는 순간, 세상의 질서가 바뀐다. 자연스러운 생로병사는 사라지고, 추상적인 기호가 구체적인 생명을 좌우한다.


67세의 현자도, 5세의 아이도, 오직 그 숫자 앞에서만 평등하다. 이는 보드리야르가 말했던 시뮬라크르의 극단적 풍경에 가깝다. 기호가 현실을 반영하는 단계를 넘어, 현실 자체를 대체해버린 세계. 숫자는 더 이상 무언가를 '가리키는' 표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세계의 운명을 규정하는 규칙이 된다.


뤼미에르 섬 주민들에게 이 숫자는 단순한 예측이나 경고가 아니라 절대적 법칙이다. 마치 우리가 지표,데이터,알고리즘의 점수로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듯, 그들은 모놀리스의 숫자에 의존해 현실을 이해한다. 누군가의 마흔두 번째 생일은 더 이상 축하할 일이 아니다. 소멸을 향한 또 하나의 계단일 뿐. 아이들의 웃음소리조차 언젠가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를 머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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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가 현실을 지우는 곳


페인트리스 알린의 존재는 그 자체로 역설이다. 그녀는 화가인 동시에 파괴자이고, 창조자인 동시에 소멸의 여신이다. 그녀의 붓끝에서는 죽음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탄생한다.


게임의 후반부에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위계를 뒤흔든다. 뤼미에르 섬과 그 주민들은 모두 알린이 캔버스에 그려낸 존재들이었다는 것. 현실을 흉내 낸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곧 현실이 된 세계.


그런데 알린은 '최종적인 신'이 아니다. 알린의 세계 뒤에는 실제 게임 디렉터와 개발자들이 있고, 그 위에는 또 이 세계를 조작하는 플레이어가 있다. 작가와 플레이어가 층층이 포개진 구조 속에서, '누가 진짜 이야기의 주인인가'라는 물음은 점점 모호해진다.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의미가 저자의 의도에 붙들려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의미는 읽는 이의 해석 속에서 새로이 태어난다. <클레르 옵스퀴르>의 구조는 이를 게임이라는 형식 속에서 극적으로 펼쳐낸다. 알린은 이야기 속에서 '신적 작가'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그려낸 세계의 최종적인 운명은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려 있다. 캔버스 위에 세계를 그리는 손과, 컨트롤러를 쥔 손이 겹쳐진다. 창조의 책임은 하나의 정답을 잃어버리고, 여러 겹의 공모 관계로 흩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뮬라크르 세계가 결코 열등한 모조품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때로는 원본보다 더 아름답고 더 온전해 보인다. 마치 우리가 SNS의 필터된 이미지나 게임 속 아바타를 통해 '더 나은 나'를 연출하듯, 알린의 그림 속 세계는 상실과 고통이 조정된, 이상향에 가까운 버전의 현실이다.

여기서 물음의 방향이 바뀐다. '이 세계가 가짜인가?'가 아니라 '가짜라면 무엇이 문제인가?'로.


동굴에서 피어난 사랑


그렇다면 이 캔버스 속 세계에 사는 이들은 어떤가. 알린이 창조한 세계의 구조를 이해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감정까지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진실한 감정들이 그 '무지' 위에서 피어난다.


플라톤의 동굴 우화에서 죄수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현실로 안다. 그들에게 진짜 세계는, 아직 돌아서 본 적 없는 빛의 방향에 숨겨져 있다. 뤼미에르 섬의 주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림 속 인물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그들만의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살아간다. 하지만 이 '무지'는 단순한 비극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마엘과 알리시아의 이야기는 이 모순을 가장 예민하게 드러낸다. 현실 세계의 알리시아는 상처받고 목소리를 잃은 소녀다. 반면 캔버스 속의 마엘은 건강하고 용감한 모험가다. 구스타브에 대한 그녀의 사랑, 원정대에 대한 우정, 동료들을 위해 내리는 수많은 선택들. 이 모든 감정이 '허구의 레이어' 위에서 전개된다고 해서, 정말 가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알리시아가 마엘의 기억을 되찾는 순간은 동굴을 나가는 깨달음의 순간과 비슷하다. 그러나 플라톤의 철학자와 달리, 그녀에게 진실은 곧바로 해방이 아니다. 진실은 상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림자 세계의 따뜻함과 현실의 냉혹함 사이에서, 그녀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여기서 게임은 플라톤의 우화를 단순히 반복하지 않고, 현대의 스크린 사회를 향해 비튼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화면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모니터, 스마트폰, TV, 게임 화면. 어쩌면 우리는 동굴 밖으로 나가는 대신, 동굴을 정교하게 리모델링하는 데 더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물음은 이렇게 바뀐다. '그림자에서 벗어날 것인가?'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그림자들 속에서 어떻게 진실하게 살 것인가?'로.


<클레르 옵스퀴르>가 보여주는 것은, 그림자 속에서도 사랑과 우정, 책임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 감정들이 허구 위에서 연기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값싼 것이라 부를 수 있을까?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라 할지라도, 그 앞에서 눈물짓는 이는 진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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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결말, 두 개의 진실


게임의 마지막에서 플레이어는 중대한 선택을 한다. 알리시아를 캔버스 안에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강제로 현실로 데려올 것인가. 이 선택은 단순한 분기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윤리학을 선택하라는 요구에 가깝다.


알리시아 엔딩 – 많은 이들을 위한 한 사람의 소진


알리시아 엔딩에서 그녀는 페인트리스의 힘을 받아들여 무너진 세계를 재건한다. 죽은 이들은 돌아오고, 깨진 관계들은 회복된다. 그녀는 그 세계의 수호자가 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태워야 한다.


이 결말은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이 자신을 희생하는 구조를 닮았다. 고전적인 공리주의의 틀로 본다면, 알리시아의 선택은 '가능한 한 많은 존재에게 가능한 한 큰 행복'을 가져오려는, 최대 행복의 논리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곧 정당성의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묻게 된다. '전체를 위해 개인이 서서히 소진되는 삶을, 정말 좋은 삶이라 부를 수 있는가?'


베르소 엔딩 – 진실을 위한 냉혹한 구원


베르소 엔딩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는 알리시아를 현실로 돌려보내기 위해, 캔버스의 모든 존재를 소멸시킨다. 진실을 위해 아름다운 거짓을 파괴하는 선택. 진짜 소녀의 삶을 위해, 그림 속 인물들의 삶을 통째로 끊어내는 행위.


이 결말은 칸트적인 의무 윤리를 떠올리게 한다.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원칙이었다. '진실을 속이지 말 것',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할 것'이라는 명령. 베르소에게는 알리시아가 '현실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그는 그녀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가 사랑한 세계를 없애는 극단적인 결단을 내린다.


그에게 캔버스 속 세계는,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답더라도, 결국 알리시아를 가두는 환상이다. 진실로 돌아가는 것(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이 그녀를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타자의 얼굴, 그리고 지워질 수 없는 것들


하지만 이때 캔버스 속 존재들은 정말 단순한 '허상'일 뿐일까?


레비나스는 말했다. 윤리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시작된다고. 중요한 것은 그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가가 아니라, 나에게 하나의 고유한 타자로 다가오는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엘과 귀스타브, 뤼미에르 섬의 주민들은 이미 알리시아와 플레이어에게 '얼굴'을 가진 타자가 되어 있다.


그들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선택이 과연 더 윤리적인지, 게임은 끝까지 대답을 미룬다. 베르소의 결단은 한 사람의 진실을 지키지만, 동시에 수많은 타자를 도구로 환원시킨다. 알리시아를 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들의 존재를 소멸시키는 것.


결국 두 엔딩 모두 완전히 깨끗한 손을 허락하지 않는다.


게임, 원본 없는 세계의 아우라


마지막 부분에서 게임은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린다. 우리는 수십 시간 동안 뤼미에르 섬에 살았다. 그 인물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운명을 걱정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그림이었다'고 선언된다. 이때 우리가 느끼는 어지러움은, 단순한 반전의 여운이 아니라, 예술과 현실에 대한 감각 그 자체가 미끄러지는 경험에 가깝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의 시대에 예술 작품의 '아우라'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여기-지금의 유일성, 원본이 가진 그 특별한 기운. 게임은 그 정의에 따르면 아예 처음부터 '원본 없는 예술'이다. 수많은 복제본이 동시에 실행되고, 언제든 다시 설치하고 삭제할 수 있는 디지털 코드.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게임 세계를 유난히 특별한 장소로 기억한다. 뤼미에르 섬 역시 그렇다. 논리적으로는 언제든 다시 로드할 수 있는 데이터일 뿐이지만, 플레이어에게는 다시는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처럼 남는다. 선택지 앞에서 손가락이 떨리던 순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시간. 이 모든 것은 복제 가능한 이미지 속에서 살아 있지만, 체험한 사람에게는 기묘한 유일성을 남긴다.


벤야민의 말을 조금 비틀어본다면, <클레르 옵스퀴르>는 원본 없는 세계도 아우라를 가질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기술적으로는 끝없이 복제되지만, 각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이야기는 단 하나뿐이다. 다른 사람도 같은 엔딩을 봤을지 모르지만, 내가 망설이던 몇 초, 내가 떠올렸던 얼굴, 내가 내려놓은 죄책감은 누구의 것과도 완전히 같을 수 없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 머무르는 법


<클레르 옵스퀴르>가 제기하는 질문들은 추상적인 철학 강의 대신, 구체적인 선택과 감정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스크린이라는 벽 앞에서 그림자와 대화하는 존재들이다. 게임, 영화, 소셜미디어... 수많은 매체가 만들어낸 시뮬라크르 속에서 우리는 울고 웃으며 의미를 찾는다.


이 게임의 미덕은, 어느 한쪽을 손쉽게 '정답'으로 지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두 엔딩 모두 어딘가 결핍되어 있고, 어느 쪽도 완전히 해피엔딩이라 부르기 어렵다. 알리시아는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소진되고, 베르소는 현실에서 영원한 그리움과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빛과 그림자 사이에 끼인 존재라는 사실이, 어떤 위로도 없이 조용히 남는다.


어쩌면 이 작품 자체가 하나의 답일지도 모른다. 페인트리스 알린이 붓으로 세계를 창조했듯, 게임 제작자들은 코드와 픽셀로 또 다른 현실을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그 세계에 들어가 그림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것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진짜 감정을 느낀다.


게임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온 지금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방금 경험한 그 모든 것은 무엇이었나? 귀스타브와 마엘의 사랑, 베르소의 희생, 알리시아의 눈물… 그것들이 단지 '스크린 위의 그림자'였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밝음과 어둠. 진실과 환상.


우리는 여전히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컨트롤러를 내려놓았지만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꺼지지 않은 화면을 바라보며.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느낀 것들(잠깐 스쳐 지나간 픽셀의 잔광과, 엔딩 후에도 가슴에 남은 무게)이야말로 우리가 두 세계를 모두 통과했다는 증거다.


그림자였지만 진짜였던 것들. 허구였지만 잊히지 않을 것들. 그것들을 품은 채, 우리는 다시 빛 쪽으로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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