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척추로 쓴 육체의 에크리튀르, 혹은 불온한 구원

소설 <헌치백>이 찢어발긴 ‘고귀한 고통’의 신화에 관하여

by 새솔

5평 남짓한 방, 인공호흡기의 규칙적인 기계음이 배경음처럼 깔린다. 침대 위에는 S자로 기이하게 휘어진 척추를 가진 여성, 샤카가 누워 있다. 그녀는 자신의 존엄을 위해 오직 여성 간병인의 손길만을 허락한다. 이 완벽한 미장센은 우리가 익히 아는 서사를 예고하는 듯하다. 고통 속에서도 성자처럼 인내하며 비장애인들에게 값싼 감동을 선사하는, 그 ‘고귀한 장애 서사’ 말이다.


그러나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은 그 안온한 기대의 지평을 첫 장부터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샤카는 거칠고, 성욕으로 들끓으며, 어둡게 낄낄거린다.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 트위터에 배설된 이 망상은 금욕적인 교훈을 기대한 독자의 뺨을 후려친다. 그녀는 야한 소설을 쓰다 멈추고 기도에서 가래를 뽑아내고, 분비물로 젖은 팬티라이너를 교체한다. 이 불온하고도 압도적인 육체성은 대체 어디서 기인하는가.


언어의 붕괴, 그리고 점액질의 재건축


일레인 스캐리는 <고통 받는 몸>에서 육체적 고통이 언어를 파괴하고, 인간을 언어 이전의 비명으로 환원시킨다고 설파했다. 샤카의 세계 역시 그러하다. 척추의 만곡이 폐를 짓누르는 감각, 침대에서 일어날 때의 정교한 각도, 근육 경련의 공포. 이 모든 물리적 제약은 비장애인의 언어로는 포착될 수 없는 낯선 안무다. 버지니아 울프가 한탄했듯, 햄릿의 고뇌를 읊을 언어는 있어도 오한과 두통을 표현할 어휘는 빈곤하기 짝이 없다.


그리하여 샤카는 울프가 요청했던 ‘더 원시적이고 외설적인’ 언어를 스스로 발명해낸다. 그녀는 ‘부처(Buddha)’라는 성스러운 필명 뒤에 숨어 가장 세속적인 포르노그래피를 쓴다. 임상적인 가래 흡입과 성적 쾌락을 하나의 문장 안에 병치시키는 그녀의 글쓰기는, 고통으로 인해 파괴된 언어의 폐허 위에 세워진 기괴한 건축물이다. 그녀는 고통을 미화하거나 완곡하게 돌려 말하지 않는다. 그저 야만적인 육체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흡수하여, 비명과 냉소가 뒤섞인 새로운 에크리튀르(écriture)로 뱉어낼 뿐이다.


취약함, 그 위험하고도 유일한 존엄


서구 근대 철학은 줄곧 ‘자율성’을 존엄의 전제조건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타인의 손을 빌려 먹고, 씻고, 배설해야 하는 샤카에게 자율성은 허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레비나스와 주디스 버틀러의 사유를 경유해야 한다. 그들은 타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과 취약성(Vulnerability)이야말로 윤리의 기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소설은 이 이론을 감상적인 휴머니즘으로 포장하는 것을 거부한다. 샤카의 부모는 그녀를 ‘유리 진열장 속 인형’처럼 멸균된 공간에 가둠으로써 존엄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샤카에게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거세였다. ‘내 피부도, 점막도 타자와의 마찰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그녀의 독백은, 상처받을 가능성이 차단된 삶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증언한다.


샤카가 남성 간병인 다나카에게 돈을 지불하고 성행위를 요구하는 장면은 그래서 충격적이다. 그것은 단순한 성욕의 해소가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한’ 필사적인 투쟁이다. 상처받고, 거절당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위험(실제로 그녀는 질식할 뻔한다) 속으로 뛰어드는 것. 비장애인들이 너무나 쉽게 향유해온 그 ‘상처받을 권리’를 획득하려는 시도다. 다나카가 도망치며 돈을 받지 않음으로써 그 거래를 무효화했을 때, 샤카가 느낀 모멸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는 샤카를 욕망의 주체가 아닌, 실수로 건드린 불쌍한 객체로 다시금 격하시켰기 때문이다.


‘영감 포르노’를 향한 냉소적 테러


장애 운동가 스텔라 영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보며 ‘내 삶은 저보다 나으니 다행이야’라고 안도하거나 얄팍한 용기를 얻는 행태를 ‘영감 포르노(Inspiration Porn)’라 명명했다. <헌치백>은 이 기만적인 소비 메커니즘에 대한 전면적인 테러다.


샤카는 대중이 원하는 ‘천사 같은 장애인’의 역할을 보란 듯이 걷어찬다. 그녀는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타인을 조롱한다. 장애인은 존중받기 위해 무해한 존재가 될 필요가 없다. 그녀는 질투하고, 분노하고, 욕망하는 ‘그냥 인간’일 뿐이다.


소설의 결말부, 메타픽션의 형식을 빌려 서사의 층위를 교란시키는 작가의 선택은 독자의 안이한 감상을 차단하는 바리케이드와 같다. 샤카의 이야기가 실재인지 소설인지, 그녀가 구원받았는지 파멸했는지 모호하게 남겨두는 이 엔딩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 불편함이야말로 작가가 의도한 미학적 성취다. <당신은 이 여자를 어떻게 소비하고 싶었는가?>라는 질문이 유령처럼 남아 독자의 등 뒤를 서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괴물도 성녀도 아닌, 지독한 실재


요양 시설의 ‘곱사등이 괴물’이 써 내려간 이 음란하고도 슬픈 서사시는, 고통이 인간을 성스럽게 만든다는 거짓말을 폭로한다. 샤카의 몸은 살기 위해 부서졌고, 그녀의 존엄은 숭고한 인내가 아니라 비루한 욕망을 긍정하는 데서 발생했다.


고통은 언어를 부수지만, 샤카는 그 파편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조립했다. 그녀는 영감을 주기 위해 전시되는 박제된 천사이기를 거부하고, 끈적하고 냄새나고 살아 펄떡이는 육체로서 우리 앞에 섰다. 이 불온한 텍스트를 덮으며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녀는 괴물도, 성녀도 아니다. 그저 살고 싶어서, 만지고 싶어서, 비틀린 척추로 세상을 들이받은, 지독하게 생생한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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