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테일 10주년을 맞이하며

와, 샌즈 아시는구나

by 새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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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스팀 리뷰들을 무심히 훑어보다가 멈춰 서게 만든 한 문장이 있었다.


“조건 없이 사랑 받는 일이 이렇게도 행복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도 힘들다.”


게임 <언더테일(Undertale)>에 달린 짧은 댓글이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내 안 어딘가를 서늘하게 울리는 여운이 감지됐다. 문득 궁금해졌다. 요즘처럼 바쁘고 차가운 시대에 “무언가를 대가 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건 과연 얼마나 가능할까?


사실 <언더테일>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부터 주변에서 ‘샌즈 아시는구나?’라는 농담이 오갈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럼에도 난 10년 가까이 이 게임을 외면했다. 2D 도트 그래픽이 취향이 아니란 핑계도 있었고, 유명세가 큰 만큼 ‘정작 플레이해보면 별거 없지 않을까’ 하는 편견도 컸다.


그러다 우연히 본 그 문장이 마음 한 켠을 파고든 뒤, 뒤늦게야 플레이를 시작했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레트로 감성의 단순한 화면 뒤에 자리한 묵직한 질문들이었다. 캐릭터들이 던지는 맑고도 깊은 애정은, 동시에 따스함과 서늘함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스팀 리뷰 한 줄은 온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픽셀에 담긴 관계의 방정식


언뜻 보면 <언더테일>은 아기자기한 도트 그래픽으로 꾸며진 전형적인 RPG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RPG가 당연하게 전제해온 ‘전투’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품이다. 마주치는 ‘적’을 쓰러뜨리는 대신, ‘말을 걸어서’ 해결할 수도 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칭찬하거나 농담을 하거나 깜짝 놀래키는 등, 각 몬스터마다 다른 접근법으로 대화를 시도할 수 있다.


이 작은 선택은 가볍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다. “단 한 번의 공격”은 누군가에게 커다란 상처가 되고, 반대로 “아주 사소한 이해의 시도”는 예상치 못한 우정을 싹틔운다. 게임이지만, 순간순간 실제 인간관계가 겹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순수함 뒤에 깃든 두려움


게임 초반에 보호자처럼 다가오는 토리엘(Toriel)은 문자 그대로 ‘무조건적 보살핌’을 보여준다. 따뜻하고 안전한 그 마음 앞에 서면, 우리는 뜻밖에도 ‘내가 과연 이 믿음을 배신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능청스러운 농담꾼 샌즈(Sans)는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겉으로는 “에헴” 하며 농담을 던지지만, 마치 플레이어를 계속 지켜보는 듯한 기묘한 존재감이 있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야”라고 무언으로 말하는 느낌이다.


결국 <언더테일>의 세계가 건네는 ‘조건 없는 호의’는 그 뒤따르는 책임감까지 고스란히 안겨준다. 어쩌면 도트 그래픽이니 덜 부담스러울 것 같지만, 막상 플레이해보면 한 번의 결정이 결코 가볍지 않게 다가와 생각을 깊게 만든다.


현실에서 반복되는 선택의 기로에


회사에서 팀 프로젝트를 할 때, 친구나 연인과의 갈등 앞에서, 혹은 가족과의 서먹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늘 비슷한 딜레마에 처한다. “이번엔 조금만 용기를 내어 먼저 다가가 볼까?” 혹은 “괜히 더 상처받을까 봐, 그냥 모른 척할까?”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동시에 그 사람의 신뢰를 받아들이는 순간 — 그건 곧 상처받을 가능성을 떠안는 일이기도 하다. “조건 없이 사랑 받는 일이 이렇게도 행복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도 힘들다”라는 말은 단지 픽셀 화면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내 일상 속에서도 늘 부딪히는, 복잡하고 애틋한 감정의 근원이다.


“서로를 놓지 않겠다”는 결심


얼핏 전혀 다른 장르처럼 보이지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역시 이와 닮은 질문을 던진다. 수많은 평행우주를 뛰어다니는 동안에도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가장 가까운 이와 이어지는 마음’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요란한 액션과 기상천외한 코미디가 펼쳐져도, 마지막 장면에는 “결국 서로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언더테일> 역시 그 결말에 이르면 “내가 이 세계 속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접 체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설령 플레이어가 이 결심을 무너뜨리면, 그 시도와 실패의 기록이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을 찌른다. 게임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조건 없이 사랑을 택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택함이 남긴 책임과 여운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끝내 사랑을 선택하는 용기


게임을 전부 클리어한 뒤, 스팀 리뷰에 적힌 문장을 다시 곱씹었다. “조건 없이 사랑 받는 일이 이렇게도 행복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도 힘들다.”


우리는 현실에서도 종종 똑같은 고민에 부닥친다. 가장 사랑하는 가족, 믿고 싶은 친구, 함께하고 싶은 연인… 하지만 갈등이 생길 때면 “이 사람을 진짜 믿어도 될까? 내가 주는 마음이 혹여 배신당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끔씩 ‘순간의 결심’으로 다시 다가서고, 또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이 바뀌기도 한다. 쉽지 않기에 더욱 값진 순간들이다.


픽셀이 비춰주는 우리의 삶


<언더테일>이 세상에 나오고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시각적 한계를 이유로 혹은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여전히 해보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 만나도 결코 늦지 않은 주제다.


현실에서 누군가를 믿고 사랑하는 일은 그만큼 무섭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다. <언더테일>은 작은 픽셀 세상을 빌려, 대가 없는 호의가 어떻게 극단적인 행복과 그만큼의 무거운 책임을 가져오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고스란히 우리의 실제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 진실이다.


어쩌면 사소한 선택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도 있고, 또 사소한 호의 하나가 깜짝 놀랄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결국 끝까지 남는 건 “나는 이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 그리고 그 결심에서 나오는 힘이다.


그러니 만약 지금 관계의 어려움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혹은 아직 <언더테일>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면, 스팀 리뷰 속 그 한 문장을 다시 떠올려보자.


“조건 없이 사랑 받는 일이 이렇게도 행복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도 힘들다.”


때때로 힘겹고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더라도, 우리가 서로를 향해 내민 손을 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은 도트 화면 너머로 더 밝은 빛을 품게 되리라. 그리고 그 순간의 용기가 결국 우리를 바꿔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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