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피의 밤과 망가진 미래

『블러드본』이 그리는 이질감의 세계

by 새솔



야남(Yharnam)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플레이어는 어디선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낯선 분위기에 휩싸인다. 고딕풍 첨탑과 황량한 거리, 단조로우면서도 불길한 사운드가 뒤엉킨 이 세계는 전형적인 호러나 판타지의 클리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뭔가가 잘못되어 버린 세계’의 기운을 진득하게 풍긴다.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고풍스러움과, 인류가 감당치 못할 우주적 비전을 결합해놓은 야남의 풍경은,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게 믿어온 “현실의 기반”마저 흔들어대는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Bloodborne-screen-03-ps4-us-10jun14.jpg


1. 밤은 왜 끝나지 않는가: 허무 속에서 반복되는 ‘사냥’


블러드본을 플레이하면 곧 익히게 될 사실이 있다. 야남의 밤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냥꾼은 죽음을 맞아도 어딘가 안전해 보이는 ‘사냥꾼의 꿈(Hunter’s Dream)’에서 다시금 깨어나고, 도시의 골목으로 되돌아간다. 고전적 RPG라면, 적을 물리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점진적 구원을 향해 나아갈 텐데, 이 작품에 그런 정통적 서사는 거의 없다.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점차 우리는 “더 이상 탈출구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품게 된다. 누군가는 여전히 희미한 구원을 찾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어쩌면 우리가 이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라는 섬뜩한 깨달음을 얻는다. 실제로 블러드본 세계 속 사람들은, 스스로 열망했던 ‘피’의 힘과 ‘위대한 존재’의 비밀을 탐하다 괴물이 되어버렸다. 한때 ‘진보’와 ‘영광’으로 가득 찼을 이 도시의 미래가 이제는 파편화된 과거로 전락했다는 점이, 밤을 영원히 붙들어 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IMG_0620.JPG


2. 인식의 대가: 알수록 부유해지는 공포


『블러드본』엔 특이한 시스템이 하나 있다. 이른바 ‘계몽(Insight)’이다. 이는 플레이어가 얼마나 우주적 진실에 가까워졌는지를 수치화해 보여주는 지표다. 하지만 계몽이 높아질수록 기괴한 환영처럼만 보이던 우주적 괴물들이 실제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알면 알수록 ‘보이게 되는’ 존재들은 과연 누구의 편일까. 아니, 그들은 아예 ‘편’이라는 개념 밖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기심은 인간을 성장시킬 수도 있지만, 이 세계에서는 지식이 오히려 개인의 정신을 허무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처음에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순수한 탐구심이었을지 몰라도, 야남의 사람들은 그 끝이 망가진 육체와 광기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이미 증명해왔다. 알면 알수록 조각나버리는 자아의 단면이, 『블러드본』의 밤거리에 피비린내를 더한다.


Bloodborne-ss-083.jpg


3. 인간의 오만: 신의 권능과 괴물의 탄생


『블러드본』은 중세풍의 호러를 넘어서, 우주적 존재(“위대한 존재(Great Ones)”)와의 접촉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이성”과 “종교” 그리고 “과학”을 총동원해 접근하고자 한 그 영역은, 결국 통제 불능의 파멸을 불러온다.

흥미로운 건, 이 도시가 그 오만을 과거형으로만 두지 않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남겨두고 있다는 점이다. 도시 구석구석, 남아 있는 연구 기록과 예배당의 흔적들, 야남 시민들의 넋 나간 신앙의 잔재를 보면, 그들이 신의 비밀을 손에 넣고자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 끝에 남은 것은 인간이 결코 다룰 수 없었던 ‘이질적 존재들’과, 저주처럼 반복되는 악몽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블러드본』의 세계관은 마치 “우리가 포기할 수 없었던 미래가 결국 괴물로 변해버렸다”는 문화적 비극을 시각화한 작품처럼 여겨진다.


some-good-looking-bloodborne-screenshots-v0-oaig57i5dd7e1.jpg


4. 고딕과 코스믹 호러의 교차점: 익숙하고도 낯선 불안


흔히 고딕 호러라 하면 고풍스러운 성당, 묘지, 촛불의 깜빡임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성의 부패를 떠올린다. 반면 코스믹 호러는 인간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우주적 실체에 대한 공포를 말한다. 『블러드본』은 이 둘을 한데 겹침으로써, “익숙한 공포가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이어진다”는 독특한 불쾌감을 만들어낸다.

늑대인간처럼 보이던 존재가, 알고 보니 신성(神性)을 탐하다 육체가 일그러진 결과물일 때,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두 겹으로 확장된다. 한 겹은 전통적 공포가 주는 ‘무서움’이고, 다른 한 겹은 알 수 없는 지식에 의해 근본적 질서가 무너졌다는 ‘심리적 붕괴감’이다. 이 지점이야말로 현대 문화 속에서 확산되는 “구조가 해체된 뒤 남은 자리”를 연상케 하며, 개인들은 그 혼란 속에서 길을 잃는다.


다운로드.jpg


5. 밤의 끝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많은 게이머가 『블러드본』을 클리어한 후에도 야남의 밤을 잊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어렵고 재미있는 게임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가 품고 있는 본질적인 결말—즉 “밤은 완전히 거둬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 일상에도 은밀히 접속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술과 정보가 무한히 증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미해결된 두려움들이 웅크리고 있다. 우리는 늘 ‘더 알고 싶다’고 외치면서도, 그 과정에서 부조리한 폭력과 광기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한다. 『블러드본』의 악몽은, 현대사회를 비추는 거울처럼 보인다. 자본과 기술, 정보가 결합해 편의성과 쾌락을 폭주시키지만, 그 밑바닥에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자라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Bloodborne+Screenshot+2020-01-15+17-07-03.png


6. 깨어나지 않는 꿈: 혹은 이미 파괴된 미래


결국 『블러드본』이 보여주는 악몽은, “벗어나야만 하는 끔찍한 세계”인 동시에 “부정할 수 없이 매혹적인 세계”다. 어쩌면 우리가 겪는 현실도 그러하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망가진 듯 보이는데, 다른 한편으론 여전히 뭔가가 움직이고 있고, 그 ‘망가진 상태’ 자체가 기묘한 매혹을 자아낸다.

야남의 저주받은 밤은, 마침내 사라지긴 할까. 혹은 우리 모두가 꿈속의 사냥꾼처럼 부활을 거듭하면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블러드본』은 그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스스로 야수화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서도, 우리는 또다시 계몽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 ‘위대한 존재’를 탐색하려 든다. 알수록 망가지는 이 지옥도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해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 게임이 던지는 가장 절묘한 역설이 아닐까.


“익숙함을 붕괴시키는 이질적 공포와, 그 심연을 향해 끝내 다가서는 우리의 욕망이 맞물린 세계. 야남의 밤은, 사실 이미 우리 현실의 은밀한 잔영이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