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
극장에 걸린 익숙한 타이틀을 보며 잠시 멈춰 선다. 오래전에 마음 한편에 새겨둔 영화가 ‘재개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 그 감흥은 단순히 과거의 추억을 되새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두 번째 마주침은 마치 첫사랑과 재회했을 때의 묘한 설렘처럼,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계기를 제공한다. 타셈 싱 감독의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하 〈더 폴〉)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1920년대 로스앤젤레스의 낡은 병원, 하반신이 마비된 채 절망의 끝에 서 있는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와 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다친 소녀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가 마주친다. 텅 빈 복도와 하얀 침대보급품들로 채워진 병실은 흔한 일상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을 경계 없이 넘나든다.
어린 소녀 알렉산드리아의 눈에 비친 병원은 그저 아픈 사람들이 머무는 제한된 장소가 아니라 ‘이야기의 씨앗’이 싹트는 무대다. “상상력은 부재하는 것을 현존하게 한다”고 말한 사르트르의 통찰이 떠오를 정도로, 알렉산드리아의 순수한 공상은 매 순간 병실의 공기를 달라지게 한다. 의무실에서 살짝 엿본 약품의 유리병 하나, 침대 밑에 굴러다니는 일상적인 사물들이 로이의 이야기를 만나는 순간 웅대한 판타지로 변주한다. 작은 창틀 밖으로 보이는 햇빛 한 줄기조차 초현실주의 화폭을 펼쳐내는 조연이 되어주는 셈이다.
〈더 폴〉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반복 이미지는 바로 ‘추락’이다. 로이는 스턴트 촬영 도중 높은 곳에서 떨어져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역시 과일나무에서 떨어져 팔을 다쳤다. 극 중 판타지 속을 누비는 다섯 영웅마저 절벽 끝에서 한순간 무너져 내리며 깊은 수렁으로 가라앉을 때가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추락의 순간마다 새로운 희망의 시야를 보여준다. 이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아직-아님(Not-Yet)’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깊은 바닥에 발이 닿을 만큼 내려앉았을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발견하기도 한다. 로이는 반복되는 추락을 통해 끝없이 자포자기하려 하지만, 어린 소녀의 작은 손길이 그를 현실로 끌어올린다. 로이가 겨우 숨을 이어갈 만큼 살아 있으므로, 이야기는 또다시 재시작될 수 있다.
로이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단순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기 연민에 빠진 채, 서사의 ‘나쁜 결말’을 통해 삶의 의지를 놓아버리는 것. 그러나 어린 알렉산드리아는 달랐다. 그녀가 꿈꾸는 결말은 로이의 절망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남아 웃음을 짓는 장면이었다.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두 사람의 ‘공동 창작물’ 속에서, 허구가 현실을 뛰어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이때 떠오르는 개념이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simulacre)’다. 원본이 없는 복제, 혹은 가상의 이미지가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작동하는 순간.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의 말 한 마디를 자기만의 상상으로 재가공해 전혀 다른 형태의 ‘인도인’이나 ‘밴디트’를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탄생하는 왜곡된 환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로이에게 새로운 감정과 희망을 불어넣는다. 허구 같아 보이는 이야기가 오히려 진실한 감정을 뚜렷이 깨우고, 현실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 스크린을 채우는 이국의 풍경은 28개국 로케이션이라는 신화를 몸소 증명하듯 눈이 부시다. 인도 조드푸르의 푸른 도시가 펼쳐지고, 사막 위에 핀 나비 모양의 섬이 등장한다. 이시오카 에이코가 디자인한 의상들은 마치 초현실주의 거장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강렬한 원색의 폭발은 단순한 ‘시각적 쾌감’을 넘어, 인물들의 내부 세계를 시각적으로 투영하는 장치가 된다.
특히 영화 속 다섯 영웅은 출신도 종족도 제각각이지만, 이 거대한 모험담 속에서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는 현실에서라면 쉽게 갈등이 생길 법한 다른 문화와 배경이, ‘이야기’라는 공통 언어를 통해 하나로 모이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연대의 광경은 곧 병실에 갇힌 로이와 알렉산드리아를 지구 한가운데로 이끌어내는 축제의 장면이 되기도 한다. 세계가 하나의 무대가 되어,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함께 울려 퍼질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더 폴〉이 보여주는 또 다른 기적이다.
영화는 절정의 순간에 우리를 무성영화의 장면으로 이끈다. 필름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스턴트맨의 얼굴이 로이와 겹치는가 하면, 가늠할 수 없는 일회성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발터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aura)’는 여기서 독특하게 부활한다. 대중에게 무한히 복제되고 상영되는 필름이지만, 그 이미지가 한 번 각인되고 나면 관객의 기억 속에서 새로운 아우라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영화를 멈추거나 되감을 수 없지만, 마음속에서 만큼은 로이의 웃음과 목소리를 언제든지 다시 재생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더 폴〉의 결말은 언뜻 보면 허무하거나 모호해 보이지만, 바로 그 ‘모호함’이야말로 서사의 계속되는 힘을 보여 준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분 불가능한 세계에 뛰어들어, 우리 각자가 원하는 이야기를 새로 써 내려갈 자유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결국 〈더 폴〉에서 알렉산드리아가 꿈꾸던 해피엔딩과 로이가 머뭇거리던 파멸의 끝자락은 모두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관객의 마음속에서 뒤섞인다. 삶이 견디기 힘든 한계 상황일수록, 이야기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힘이 된다는 것. 비록 그것이 거짓이나 환상이라 할지라도, 어떤 진실보다도 강력한 감정과 구원의 손길을 줄 수 있다.
재개봉을 통해 다시 찾아온 〈더 폴〉은 바닥 끝에서 피어나는 이야기의 싹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일깨워 준다. 고통스럽게 떨어지던 그 순간마저 “아직-아님”의 희망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음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로 ‘공동의 상상력’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언뜻 보면 한낱 ‘거짓말’일 뿐인 이야기들이, 진실된 손길을 건네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 마법 같은 깨달음이야말로 영화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지점이다.
“추락 속에서도 피어나는 이야기, 그 허구의 힘이 우리를 다시금 비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