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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과 파멸 사이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에 관한 철학적 시선

by 새솔 Feb 26. 2025


1. 파멸의 이미지, 우울을 찬미하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는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서 한 번쯤 꿈꿔보았을지도 모를 ‘세계의 종말’을 그려낸다. 하지만 이 세계는 황폐한 디스토피아나 서사적 파국이 아니라, 매우 사적인 우울과 함께 천천히 붕괴한다. 오프닝에서 펼쳐지는 ‘슬로모션 이미지’는 마치 신화적이고도 유화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행성 멜랑콜리아가 서서히 지구에 가까워지면서, 관객은 이 영상미에 매혹됨과 동시에 극단적 불안에 빠져든다.

이런 불안은 현대인에게 결코 낯선 감정이 아니다. 날마다 들려오는 재해 소식, 예측할 수 없는 경기 침체, 그리고 상실감으로 가득한 개인의 삶이 종말의 이미지를 이미 암묵적으로 예습해온 것이다. 폰 트리에는 이러한 불안을 고요하고도 찬란하게, 그러나 결코 위안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에 새겨놓는다.


2. 저스틴의 우울: 결혼식에서 탈주하는 신부


영화는 결혼식 당일인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의 심리를 통해 ‘우울증’이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묻는다. 결혼식은 통상적으로 새로운 출발과 축하의 장이지만, 이 영화에서 결혼식은 무너짐과 불안이 집약된 장소다. 저스틴은 자신의 상징적 역할(‘행복한 신부’)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상징계’의 실패로 볼 수 있다. 라캉의 개념을 빌리자면, 저스틴은 사회가 기대하는 기표들(신부, 아내, 딸)의 자리를 온전히 점유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자꾸만 비껴선다.

그렇다고 그녀의 우울이 단순히 개인의 병리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저스틴의 무기력은 시대가 전반적으로 품고 있는 절망과 예감—‘더 이상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대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저스틴만이 그 종말을 온전히 감지하고 받아들인다. 결혼식이라는 ‘상징적 축제’가, 개인의 무력함과 행성 충돌이라는 ‘실재’ 앞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함을 폭로하는 것이다.



3.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종말의 아름다움과 불안


전반부의 결혼식이 상징계의 붕괴를 보여주었다면, 후반부는 스펙터클한 종말 자체가 주무대가 된다. 다가오는 행성 멜랑콜리아는 미학적으로 강렬한 색감과 엄숙한 분위기로 그려지는데, 이는 칸트가 말한 ‘숭고(The Sublime)’를 연상시킨다. 자연이나 우주의 압도적 규모 앞에서 인간은 오히려 경외감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이 부분에서 “우주는 과연 무심한가”라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永遠回歸)’처럼, 되풀이되는 삶의 고통과 무의미가 궁극적으로는 종말로 수렴될 때, 인간이 찾을 수 있는 위안은 무엇인가? 영화 속 인물들은 구원이나 희망을 찾기보다는 ‘불안과 아름다움이 겹쳐지는 순간’을 목격한다. 저스틴이 우주적 파국을 비교적 차분히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 자체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절망의 극단까지 가본 사람만이 마주할 수 있는 평온 같은 것일까, 아니면 완벽한 체념일 뿐일까.


4. 실재(Real)와 구원 불가능성, 그 너머의 가능성


라캉적인 의미에서 ‘실재’란 상징질서로 포착되지 않는 것, 말로 온전히 해명할 수 없는 충격적 장면을 일컫는다. 「멜랑콜리아」에서 종말은 상징계가 억지로 덧씌우려 했던 삶의 질서와 희망을 산산이 부순다. 한편, 클레어(샤롯 갱스부르)처럼 극도로 공포에 질려 끝까지 희망적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인물도 있지만, 이 역시 별다른 작동을 하지 못한다. 종말 앞에서는 어떤 의미 부여나 서사도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우울의 세계’로 곧장 걸어들어가는 자와, 끝까지 상징질서 속에서 발버둥치다 무너지는 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구원은 ‘없음’일까. 혹은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일종의 구원일까. 폰 트리에의 시선은 감상적 연민이나 순수한 처벌에서 한 발 비껴서, 관객이 그것을 직접 경험하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그 지점에서 관객은 묵직한 사유에 잠길 수밖에 없다. ‘종말을 알고도 나아갈 수 있는 우리’라는 발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희망에 대한 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완전히 무의미한 세계라면, 도리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보통 이런 질문은 종말이 아니라 일상에서 던져야 할 법한 것이지만, 폰 트리에는 우주적 충돌을 동원해 우리의 ‘실존적 고민’을 예리하게 끌어올린다.



“종말의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우울 그 너머의 가능성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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