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주어진 일이 오직 생존이었던 시기가 있었다.
하루종일 먹을 걸 찾아다니고 맹수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리를 지어 다니던 시절.
그때는 피디나 작가 같은 직업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
이후 먹을 것을 비축해 둘 수 있게 되자, 하루하루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사냥하는 인력이 줄어들고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게 됐다.
아마도 이때부터 예술과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작가와의 미팅에서 현실을 자각하게 됐다.
나는 지금 생존도 예술도 택하지 못한 어중간한 인간이다.
인류가 지구에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대략 300만 년에서 350만 년 사이라고 한다.
흔히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불리는 유인원은 현재 인간 뇌 용량의 1/3 수준이었다.
다윈의 이론에 의하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하빌리스, 호모에렉투스, 호모사피엔스를 거쳐 지금의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가설도 있다. 인간은 진화한 게 아니라 동시대에 이런 종류의 유인원들이 모두 존재했었는데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게 호모사피엔스라는 가설이다.
또 다른 가설은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본인들의 후세를 퍼뜨린 게 인간이란 설도 있다.
무엇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간은 현재 존재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진화론에 의하면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지고, 도구를 쓰게 되면서 두뇌 용량이 커지고 지능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의 지각과 지능을 갖게 된 것은 두 발로 걸어 다녔기 때문이다.
나의 지능과 지각은 감사해야 할 일일까?
동물들은 본능이 있다. 배고픔과 편안함, 두려움, 고통등을 느낄 수 있지만 본능 이상의 것을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은 한 사람의 몸에 하나의 영혼이 녹아져 있다. 그 영혼이 머무는 육체는 곧 실체가 된다. 내 몸을 나는 나로 인지한다.
인간 모두는 ‘나’를 객관화시킬 수 있다. 내가 있는 이곳을 3D로 구성한 후 하늘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안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을 관찰할 수도 있다. 인간을 제외한 어떤 동물도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능력은 곧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하게 만들었고 부끄러움을 알게 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갖는 것도 가능해졌다. 갖고 싶고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이 모든 게 나를 객관화할 수 있게 되면서 생긴 일들이다.
욕망은 인간세상을 발전시켜 왔다.
욕망은 사람을 똑똑하고 부지런하게 만든다. 당장 먹을 것이 쌓여 있어도 내일, 다음 달, 내년, 10년 후의 먹을 것도 준비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게 만들었고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원리, 행복한 삶에 대해서도 깨닫게 만들었다. 때로는 그 욕망이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대체로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집에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작가의 말대로 회사를 그만둬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별 관심도 없는 일을 월급을 받기 위해 계속할 것인가…
돈이 안될 수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것인가…
그 순간 전화기 진동음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다. 받을까 말까 1초간 생각하다 받았다.
“2189 차주 되시나요?”
“네”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주차를 하다가 살짝 긁은 것 같아서요. 같은 아파트 주민이셔서 전화드리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요“
”아, 많이 긁혔나요?“
”제가 보기엔 괜찮은 거 같은데, 그래도 한번 내려와 보시겠어요?“
방금 전까지 인간의 탄생과 욕망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반바지에 면티, 모자를 눌러쓰고 슬리퍼를 끌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현실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피디라서 그런가, 나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다. 첫눈에 그 사람의 간단한 프로필을 뽑을 수 있다.
나이는 60대 초중반, 155cm의 키에 몸무게는 60kg쯤 되는 여자가 핸드폰을 들고 내 차 주변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전화상의 목소리와 차이가 난다. 목소리로는 30대 여자였던 것 같은데…
찍혀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봤다.
“내려오셨어요? 잠깐만요 저희 엄마가 차 앞에 계실 텐데 저도 바로 내려갈께요“
그 순간 엄마라는 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 딸이 운전이 서툴러서 살짝 긁은 모양이에요. 앞에 범퍼 어디라고 하던데 잠깐이면 다시 내려올 거니까… 같은 아파트 사는데 모른 척 지나치면 안 되니까 전화한 모양인데, 티도 안 나는데 얘는 참”
앞부분을 훑어봤다. 운전석 쪽에 살짝 긁힌 흔적이 있다. 내가 봐도 티가 안 난다.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그냥 모르고 지나쳤을 정도의 흠집이다.
“네 정말 티도 안 나네요. 그냥 지나치셔도 됐을 텐데,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얘가 이렇게 착하다니까 법 없이도 살 애라니까“
부모들은 틈만 나면 자식자랑이다.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수리비가 나올 정도도 아닌 것 같아요. 전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아이고 그래요? 고마워요. 혹시 뭐 하시는 분이세요?”
“저요? 피디인데 왜 그러시죠?”
“아 방송국 다니시는구나 훌륭하신 일 하시네.“
대부분의 어른들은 직업보다는 직장의 개념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무슨 일을 하는지보단 어떤 회사, 어떤 건물에 다니는지로 그 사람을 평가하기 쉽다. 피디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꼭 방송국이 아닌 곳이 직장일 수 있지만, 피디는 방송국이다. 제품 디자인을 하거나 프로그램을 짜거나 반도체 테스트를 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설명하는 것보다 ‘삼성에 다녀요’라고 말하는 게 훨씬 간편하고 고평가를 받기에 효과적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깊이 있게 고민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걸까…
그런 측면에선 노인들에게 투표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나는 방송국 피디가 맞지만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수리비는 안 받으신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미안한데, 내가 잠깐 뭐 좀 갖다 드릴게 여기 잠깐만 계세요”
“아뇨 그러실 필요 없는데, 정말 괜찮아요”
“아니다, 우리 딸한테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잠깐만 있어봐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기도 어색하고, 뭘 주는지도 궁금하고 도대체 어떻게 생긴 딸이 차를 긁었는지도 궁금해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엄마와 통화를 마친 딸이 잠시 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