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나기로 한 작가는 두 번 같이 일해 본 프리랜서 작가다.
나이는 30대 중반에 160cm 정도의 키에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청바지에 면티를 입고 있다.
말투가 친절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예의가 없지도 않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사회적이다.
입으로는 동의하지만 얼굴 표정은 반대를 하기도 하고 웃으면서 입모양으로만 욕을 날리기도 하는 희한한 능력이 있다. 대체로 눈치가 빠르고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파악하지만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듯 고집이 세다. 연차가 쌓일수록 그 고집의 방향이 본인이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경력이 짧은 작가가 일을 더 잘할 때도 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요새는 어떤 작업하고 계세요?“
”요새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 예능도 하고 사내방송도 하고 홍보물도 하고.. 먹고살려면 가릴 수 있나요 뭐“
”바쁘시겠구나, 저랑 같이 하실 시간 되시겠어요?“
일종의 이 자리도 서로를 타진하는 면접의 성격이 크다. 고용하려는 자와 일의 종류, 조건을 가늠해 보려는 자. 겉으론 평화롭지만 고성이 오가기도 하고 딜을 주고받기도 한다.
“일단 어떤 아이템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바쁜 일은 없지만 네가 하는 말을 들어보고 일이 쉬울지 어려울지 판단해서 결정해 보겠다는 뜻이다.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작가님 어디에 사세요?”
“마포에 사는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저는 지구에 살거든요”
이 새끼가 나이를 먹더니 아재개그에 빠진 건가 하는 표정을 순간 지으며 웃어주는 척했지만 눈으로는 욕을 하고 있었다.
“아… 네, 저도 지구에 사니까 같은 동네 사는거네요“
작가가 마지못해 맞장구를 쳐준다.
“사실 이번 아이템이 ‘지구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거든요”
“뭘 어떻게 살아요. 그냥 태어났으니 죽지 못해 사는 거지”
역시 작가들은 냉소적이다. 하지만 직전까지 졸린 눈에서 눈동자에 힘이 좀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지구가 주제인 거예요?”
“아뇨, 사람이요. 사람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지구를 가장 힘들게 하고 병들게 하고 있는 것도 인간이고. 인간의 삶이 길어야 백 년인데 그 짧은 시간을 살면서 이렇게 몹쓸 짓들을 하고 사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그럼 환경문제를 다루겠다는 건가요? ESG?”
“환경이 포함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인생’을 다루고 싶어요.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는 삶인지, 인간은 왜 지능과 의식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을까. 그 능력을 지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요.”
“재밌을 거 같긴 한데, 데스크에서 오케이 한 거예요? 제작비도 많이 들 거 같고 사람들이 관심 있어할지도 의문이고, CG도 많이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
”그런 걱정은 마세요. 그런 건 진작에 뿌러트렸죠“
큰소리는 쳤지만, 제작비 얘기는 아직 꺼내지도 못한 상태다. 어쨌든 작가가 관심을 보였다는 게 중요하다.
이 정도면 조건만 맞으면 할 것 같다.
“일단 뭔지는 알겠네요. 1시간짜리 다큐로 생각하세요? 그런 내용의 프로그램은 넷플릭스 이런데 쎄고 쎘는데,
스케일을 우리가 따라갈 수가 없을걸요? BBC 다큐 같은 거 보면 촬영도 쩔잖아요.“
얘는 벌써 한 팀이 됐다고 생각하나 보나.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하지만 BBC 다큐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한창 야동을 보고 있는데 문을 따고 들어온 여동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뼈 때리는 말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작가의 말이 맞았다. 이런 주제로 영상을 만들려면 넷플릭스에서 뛰어들지 않으면 쉽지 않을 것이다. 살짝 짜증이 올라와서 나오는 데로 뱉어버렸다.
“누가 꼭 영상으로 하겠데요? 웹툰도 있고 소설도 있고 유튜브도 있고 다양하잖아요“
“피디님 회사 차렸어요? 부서를 옮겼나? 거기서 그런 걸 할리가 없잖아요. 피디님이나 저나 예술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전에도 이런 얘기 나눈 것 같은데? 제가 뭐라 했어요. 우리는 ‘정보유통업 종사자’라고 하지 않았어요?
정보유통업이라는 단어에 그날이 떠올랐다.
1년 전쯤 현충일 특집 프로그램을 마치고 제작스태프들과 회식을 할 때였다. 그때 작가와 마주 앉아 청하를 마시며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회생활하면서 가장 금기시해야 할 이야기 주제가 정치, 종교, 성에 관한 주제이지만… 어디서부터 시작이었는지 모르게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피디님은 스스로를 뭐라고 생각하세요?’
‘직장인이지. 나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저 미친 부장새끼가 하라면 하고 까라면 까는 그냥 직장인이지‘
’기레기새끼… 그런 새끼들이 언론사에서 일을 하면 기레기소리를 듣는 거야. 하긴 그 미친 부장새끼가 엄마 기레기새끼지’
‘우리 많이 배우신 작가님이 말이 짧고 거치시네’
‘그래도 배웠다는 인간들이 돈 벌기 위해 정보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게 기레기지. 좀 고급지게 표현하면 정보유통업 종사자! 안 그래요?’
보통 피디들은 내가 갑이라는 우월감과 자부심이 있다. 연차가 쌓일수록 갑으로 지낸 세월이 많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더 강화된다. 감히 작가 나부랭이가 술 먹고 기레기니 하는 꼴이 곱게 보일리 없었지만 틀린 말이 없어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피디 10년 차에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매월 나오는 월급과 인센티브, 회사의 각종 혜택들이 나를 정보유통업 종사자로 만들고 있었다.
“맞다,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죠? 작가님이 막 반말과 쌍욕을 섞어가면서 엄청 흥분하셨었는데”
“논점 흐리지 마시고요. 돈도 안될 거 같은 아이템을 회사에서 오케이 했을 것 같지 않아서 드리는 말씀이죠”
“저 이제는 정보유통업 안 할 거예요.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될 겁니다“
작가는 그렇게 한 5분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