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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May 06. 2024

바흐(Bach)에 관한 간단한 이야기를 해봅시다(2)

독일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바흐기념상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불세출의 음악가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가 잠시라도 스쳐간 독일의 마을(도시)들은 예외 없이 "바흐기념상(Bachdenkmal)"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마을(도시)에 바흐가 살았었다는 것을 기념하고 있고, 또 실제로 그를 보러 많은 관광객들이 그들 마을(도시)들을 찾고 있다. 나 또한 그렇게 바흐기념상을 보러 독일의 여러 도시들을 찾아다녔는데, 이번 글에서는 그렇게 만났던 바흐기념상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1. 아이제나흐(Eisenach)


바흐는 1685년 3월 21일에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막상 이 도시에는 바흐의 생가(生家)라고 소개되어 있는 곳은 없다. 물론 아이제나흐에 바흐의 집(Bachhaus)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은 바흐의 생가가 아니라 바흐의 친척집이었던 곳이다. 그러나 아이제나흐 사람들은 이곳에 독일 최초의 바흐박물관을 만들었고, 이를 보려고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아이제나흐로 몰려들고 있다. 나 또한 그중의 한 사람이었고. 사실 관광사업이라는 것, 일단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유명세를 타기만 하면 그로 인한 가치 창출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 바흐의 집이 있는 아이제나흐의 경우만 해도 (관광객들이 쓰는 체재비나 식음료비는 제외하고서라도) 단순히 바흐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료 수입만으로도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누리고 있는데, 2024년 현재 입장료는 12.5유로(1만 9천 원 정도)이다.   

바흐의 집을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 경우 멀리서도 "아, 저곳이 바흐의 집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흐의 동상이다. 이는 바흐의 집 자체가 외관상 멋있다거나, 특별히 다른 건물 대비되는 특징을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당연히 먼저 바흐의 동상을 사진에 담아야 할 것이다. 

바흐의 집 외관인데, 왼쪽의 노란 건물이 바흐의 집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보이는 하얀색(?) 건물이 바흐박물관인데, 아니 제 나하의 바흐박물관은 독일에서 가장 큰 음악박물관이다.



2. 아른슈타트(Arnstadt)


바흐의 음악 인생은 아른슈타트에 있는 바흐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서 시작되는데, 물론 이곳에서도 바흐기념상을 만날 수 있다. 아른슈타트의 "바흐기념상"은 이곳 사람들의 삶의 축을 이루었던 시장광장(Marktplatz)에 이렇게 세워져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바흐의 동상들과는 그 모습이 많이 달라 조금 생소한 모습이다. 고백하건대, 나 또한 그러했다. 심지어 바흐기념상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이곳을 찾았을 때, 이 기념상 앞에서도 바흐기념상을 찾고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바흐가 이곳에서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던 때가 그의 나이 18세에서 22세일 때까지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곳 아른슈타트의 바흐기념상이 이렇게 청년 시절의 바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기념상 뒤편 하단. "아른슈타트(Arnstadt),  1703-1707"이라고 새겨져 있다. 

바흐기념상을 뒤에서 바라보고 찍은 사진인데, 전면에 멋들어진 붉은색 건물이 같이 딸려 들어왔다.

이 건물은 아른슈타트의 시청사(Rathaus)인데, 1581년의 대화재로 불타 없어진 뒤 1582년부터 1586년까지 4년에 걸쳐 새로 건축된 건물이다. 멋진 벽과 장식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파사드로 유명한 건물로 이렇게 시장광장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시장광장의 모습.



3. 뮐하우젠(Mühlhausen)


1707년. 바흐는 아른슈타트에서의 4년간의 생활을 청산하고, 아른슈타트에서 60여 km 떨어진 뮐하우젠의 "성 블라지우스교회(Divi-Blasii-Kirche)"의 오르가니스트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비록 1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말이다. 이처럼 바흐가 짧게 머물렀을 뿐인데 불구하고, 뮐하우젠 사람들은 바흐가 자신들의 도시에 잠깐이나마 머물렀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이는 바흐가 오르간 주자로 활약한 성 블라지우스교회를 찾아가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뮐하우젠 시청사에서 성블라지우스 교회 쪽으로 이어지는 Rats거리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성 블라지우스교회의 모습이다. 

위 사진 앞쪽 한가운데 자그마한 동상이 서있는 것이 보일 텐데, 그것이 바로 바흐기념상이다. 가까이 가보면 바흐기념상은 우리가 지금껏 보아왔던 바흐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청년 바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허긴 바흐가 이곳에서 오르가니스트로 활약할 당시 그의 나이가 22-23세였으니, 이 모습이 더 현실적이기는 하다.

한편 바흐에 대한 안내판은 이렇게 따로 세워져 있는데, "바흐는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인 1707년 부활절에 이미 이곳에서 오르간을 연주하여 듣는 이에게 깊은 감명을 남겼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칸타타를 1802년 2월 이곳에서 완성했다"라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4. 도른하임(Dornheim)


바흐는 1707년 뮐하우젠의 "성 블라지우스 교회(St. Davi Blasii Kirche)"의 오르가니스트로 자리를 옮긴 후, 같은 해 10월 17일 그의 육촌 누이동생인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 Bach, 1684~1720)와 결혼을 한다. 그래서 난 당연히 바흐가 뮐하우젠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독일 현지에서 얻은 자료를 통해 막상 바흐가 결혼식을 올린 곳은 아른슈타트 인근의 도른하임에 있는 "성 바르톨레메오(St. Bartholomäus)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 오늘날 성 바르톨레메오교회는 그 본래의 이름보다 "바흐가 결혼식을 올린 교회 (Traukirche)"로 더 많이 소개되고 있다. 


그렇게 찾아간 도른하임의 성 바르톨레메오 교회.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담에 바흐의 흉상이 보이고, 그 밑으로 "이곳에서 1707년 10월 17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와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가 결혼식을 올렸다"라고 쓰여 있다.

또한 이 벽에는 "바흐를 기억하며"라는 글 밑으로 바흐의 일생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글도 써 놓았다: "바흐는 1685년 3월 21일에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태어나고, 1707년 10월 17일에 이곳에서 결혼하였으며, 1750년 7월 28일에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사망했다".



5. 바이마르(Weimar)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10년 가까이 살았으며, 이곳에서 두 명의 아이를 얻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바이마르는 바흐가 태어나 자란 아이제나흐와 그가 죽음을 맞이한 라이프치히(Leipzig)를 제외하면, 바흐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도시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이마르에는 내가 아는 한 (바흐하우스, 바흐 박물관 등의 이름을 가진) 바흐를 기억하게 만드는 별도의 공간이 없다. 그저 이렇게 그가 살았던 집의 한 구석에 그의 흉상이 하나 서있는 것이 전부인데, 이곳의 흉상은 아른슈타트와 뮐하우젠의 바흐기념상과 달리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편 이 집의 외벽에는 "이곳에서 바흐가 1708년부터 1717년까지 살았다"라고 쓰여 있는 석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이 석판에는 "1710년에 프리데만(Friedemann), 1714년에 필립 에마누엘(Philipp Emanuel)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6. 쾨텐(Köthen)


바흐는 튀링엔(Thüringen) 주의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나서 연주자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다지게 된 바이마르 시절까지 단 한 번도 튀링엔 주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러다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 무렵 자신의 음악가로서의 삶을 완성할 수 있는 여건을 찾아 드디어 튀링엔 주를 벗어나게 되는데, 그가 맨 처음 선택한 곳은 튀링엔 주 바로 위쪽에 붙어 있는 작센-안할트(Sachsen-Anhalt) 주의 쾨텐이었다. 그리고 1723년에 라이프치히(Leipzig)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이곳에서 6년을 보냈다. 한편 쾨텐 역시 바흐의 기념상을 만들어 놓고 자신들의 도시에 바흐가 살았음을 기념하고 있는데, 이제 바흐기념상을 만나러 가보도록 하겠다. 


바흐기념상은 성 야곱교회(St. Jakobskirche) 뒤쪽으로 나있는 슐스트라세(Schulstraße, 아래 사진 참조)를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데, 이 거리의 끝에 바흐기념상이 있다. 

슐스트라세를 조금 더 걸어 내려가면 자그마한 분수(?) 뒤로 하얀색 흉상이 하나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바흐기념상이다. 

바흐기념상. "기단 부분에 바흐가 1717년에서 1723까지 쾨텐에서 궁정악장(Hofkapellmeister)으로 활약했다"라고 적혀 있다. 바흐가 쾨텐에서 살았던 때가 그의 나이 32세에서 38세까지라서 그런지, 기념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하고 있다. 다만 얼굴에서는 여전히 젊은 바흐의 보습이 엿보인다. 

바흐기념상이 쾨텐 성이나 시청사에 있지 않고 이곳에 서있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바흐기념상 뒤에 보이는 건물 어딘가에 바흐가 살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바흐기념상과 바흐가 살았던 집에 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 이미 다른 글에서 써놓은 바 있는데, 궁급하면 아래 사이트를 찾아가 보기를...

쾨텐에서 바흐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또 한 곳 있는데, 쾨텐에서 궁정악장으로 활약했던 바흐가 쾨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쾨텐 성(Schloss Köthen)"이 그곳이다. 쾨텐 성 한쪽 벽에 보이는 바흐의 모습인데, 그 밑으로 "이곳에서 바흐가 1717년부터 1723년까지 불멸의 작품을 썼다"라고 새겨져 있다. 

아, 쾨텐 성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위와 같은 사진은 내가 찍을 수는 없는 것이고, 아래 사이트에서 퍼온 것임을 밝혀 둔다. 



7. 라이프치히(Leipzig)


바이마르 시절까지 주로 연주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바흐는 쾨텐에서부터 작곡가로서 위병을 떨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쩌니저쩌니 해도 그의 음악가로서의 황금기는 역시 라이프치히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심축을 이루는 곳이 바로 토마스교회(Thomaskircjhe)이다. 토마스교회는 교회 자체의 건축양식의 특성이나 내부장식의 화려함 등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바흐가 이 교회의 칸토르(Kantor)로 있으면서 불후의 명곡들을 쏟아냈다는 것 때문에 유명하다. 그 때문에 토마스교회 앞에는 이렇게 바흐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아, 토마스교회의 외관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며,   

내부의 중앙제단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위 사진을 보면 중앙제단 앞에 꽃이 보일 텐데, 꽃이 놓여 있는 그곳이 바로 바흐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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