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유구천(維鳩川)이 흐르는 오랜 고장 "유구(維鳩)"
# 첫째 마당: 유구읍(維鳩邑), 그리고 유구천(維鳩川)
공주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유구(維鳩)라는 지명은 아마도 무척 생소할 것이다. 일단 유구가 어디메 붙어있는 곳인지는 아래 공주시 행정지도를 통해 알 수 있는데, 보다시피 유구읍은 공주시의 북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북으로는 아산시, 그리고 서로는 예산군과 접해 있고.
유구읍(아래 지도상의 회색 부분)은 경기도 의정부와 충청남도 부여를 잇는 39번 국도상에 있는데, 유구읍 중앙부에는 유구천(아래 지도상의 하늘색으로 이어지는 선)이 흐르고 있고, 취락은 유구천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다. 이는 유구천 유역의 동서남북의 사방이 대부분 비교적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음을 고려하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특이사항(?)은 유구읍이 공주시에서 유일하게 '읍'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란 것인데, 내가 여기서 유구'읍'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방행정단위에 있어 읍이 면보다 더 상위에 있다는 것 때문이다. 참고로 말해두면 '면'은 법으로 정해진 설치기준이 없는 것에 반해, '읍'은 법으로 "그 대부분이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인구가 2만 이상"이 되어야 설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지방자치법 제10조 제3항).
이처럼 유구에 읍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유구가 무언가 공주의 다른 행정단위(면)들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바로 유구가 한때 우리나라에서 섬유생산의 1번지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유구에는 우리나라 굴지의 섬유공장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최전성기 때는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여성근로자만 해도 3,000명을 훌쩍 넘겼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읍의 설치기준을 충족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 1995년에 유구면이 유구읍으로 승격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드는 의문은 왜 하필 섬유산업이 유구에서 발달했을까 하는 것인데, 그 이유를 알려면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유구 지역은 예로부터 호남과 개성(한양)을 연결하는 중심 통로 역할을 하던 교통의 요지였다. 때문에 고려시대 때부터 이곳에 나라의 교통통신 기관으로 기능하고 행인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유구'역(驛)'을 두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유구역에는 기마 5 필과 복마(卜馬) 5 필, 노(奴, 남자하인) 38명, 비(婢, 여자하인) 18명'이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 내가 고간원지를 이야기할 때 문극겸이 유구 역사의 벽에 시 한수를 남겼었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이제 전체 스토리가 이해될 것이다.
## 둘째 마당: 유구섬유역사전시관
1. 외관 및 입구
유구의 발전과 쇠락,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의 그것은 섬유를 떼놓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유구가 읍으로 지정되며 발전할 수 있었던 원인도, 또 유구가 1990년대 후반의 IMF사태의 직격탄을 맞으며 그만 퇴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윈인도 모두 이곳의 섬유산업과 관련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유구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했던 유구 섬유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유구섬유역사전시관'이 바로 그곳이다. 아, 유구섬유역사전시관의 위치, 운영시간 등에 관한 정보는 네이버 또는 유구섬유역사전시관 홈페이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다.
유구섬유역사전시관의 외관인데, 보다시피 그리 크지 않은 단층건물이다.
전시관 바로 앞에 (장애인 전용주차공간을 빼면) 3~4대의 자동차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두 번을 찾았지만 두 번 모두 이곳에 주차하지는 못했다.
유구섬유역사전시관 입구 우측벽에 붙어 있는 명판인데, '유구의 빛'이라는 시가 적혀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유구읍의 사진이 보이고, 그 앞에 섬유제품과 관람객의 후기가 적힌 종이들이 매달려있는 나무가 있다.
음, 섬유를 영어로는 Textile이라고 쓰는구나.
한편 입구 오른쪽에는 관람객들이 말하는 유구섬유역사전시관 이야기, 그리고 스스로 그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유구섬유역사전시관의 구조는 아래 도면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오른쪽에 약간 돌출된 부분이 입구에 해당한다. 위에서 보여준 3장의 사진은 입구를 지나면 만나게 되는 방에 있다. 아, 실제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은 아래 사진 속의 2~9번의 전시물이 있는 두 개의 방이 전부이다.
2. 제1전시실
첫 번째 전시실의 왼쪽 벽은 섬유산업과 함께 걸어온 유구의 80년 세월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유구섬유역사'라는 전시물이 장식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이하에서 사진으로 보여주도록 하겠다.
먼저 유구섬유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1940년대..
이어서 본격적인 공장이 설립되기 시작한 1950년대... 이 시기를 유구 직조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수직기를 뒤로하고 현대화된 직조기계인 동력북직기가 보급되면서 직조산업의 본격적인 공업화가 1960년대를 거치며 이루어진다.
무북직기의 도입으로 기계를 보는 여성인력이 감축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1990년대부터 값싼 중국직물이 들어오면서 유구 직조산업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7년 IMF한파가 들이닥치면서 유구 직조산업 또한 급격히 붕괴되게 된다.
그러나 전통의 힘이란 것이 참 무서워서 유구의 섬유산업이 그리 쉽게 궤멸되지는 않는다. 오랜 전통의 힘으로 부활의 날갯짓을 하더니, 유구의 섬유산업은 2006년부터 드디어 비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오늘날에는 내수시장에서만도 연 200억의 수익을 창출하고, 국내 여성 고급한복지의 80%를 생산하고 있다.
첫 번째 전시실 중앙에는 직조기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한 장은 앞쪽에서 또 한 장은 뒤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자, 이제 첫 번째 전시실의 전시물을 하나씩 보여주도록 하겠다. 먼저 이것은 가장 고전적인 실잣는 도구인 '물레'이고,
이것은 전통사회에서 옷감을 짜던 베틀이다. 보다시피 목재로 만들어져 있는데, 주로 가정에서 아낙네들이 피륙을 짜내는 길쌈에 사용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직기(手織機)인데, 경사와 위사의 두 개줄을 사용하여 경사방향으로 연속된 직사각형의 직물을 짜는 기구이다.
아, 이것에 대해서는 별 다른 설명이 없는데, 가장 발전된 형태의 수직기가 아닐까 싶다. 국내 유일의 색동옷감 생산지인 유구를 상징하는 색동옷감이 걸려있는 것이 눈에 띈다.
처음으로 듣고 보는 이것은 '꾸리감기'라는 것인데,
그에 관한 설명은 아래 사진으로 대신하겠다.
3. 제2전시실
두 번째 전시실의 전경.
위 사진을 기준으로 좌측에 '유구 섬유산업의 르네상스를 이끈 장인"들이란 제하에, 유구 지역에 제일 먼저 설립된 섬유공장인 황금직물을 비롯하여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유구에 설립되었던 공장들의 이름이 주욱 적혀있다. 보다시피 1980년대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많이 들어섰다.
가장 근래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수직기. 실, 꾸리감기 등등이 보인다.
직물의 꽃이라고 불리는 자카드에 관한 설명인데, 펀치카드가 있는 자카드직기를 이용하면 복잡하고 입체적인 무늬를 가진 자카드 직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펀치카드와 자카드직기의 모습.
### 셋째 마당: 벽화거리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유구읍은 6‧25 전쟁 때 이북의 직조공들이 정착하면서, 직물 짜는 기계 소리가 온 동네를 가득 메웠던 곳이다. 한창 때는 200여 곳이나 되는 방직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3,000명이 넘는 여공들이 직조기를 돌려댔지. 그러나 그렇게 번창하던 섬유의 메카 유구에 이제 남아 있는 방직공장은 10여 곳에 불과하다. 그렇듯 폐업한 공장들로 거리에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할 때, 유구 사람들은 폐허가 된 그들 공장의 외벽에 작품성 있는 벽화를 그려 넣어 '벽화거리'를 조성하여 분위기를 일신했다.
사실 요즘 들어 전국 곳곳에 벽화거리가 생겨나고 있기는 하지만 유구 벽화거리는 여타 벽화거리와는 확실한 차별성을 띠고 있다. 보통 벽화거리라고 하는 곳들은 대부분 자그마한 집들 외벽에 빼곡하게 그림을 그려 넣어 역설적으로 오히려 답답함을 초래하는 면이 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귀여운 모습으로 어필하게 되는데, 솔직히 난 그런 식의 벽화거리들이 마냥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에 반해 유구의 벽화거리는 폐업한 공장의 외벽에 조성된 관계로 화면의 크기가 엄청나게 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작이 들어서게 되고, 여백의 미학이 강조된다. 때문에 다른 곳의 벽화거리에서 만나는 답답함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유구 벽화거리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인데, 우리의 전통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담백한 화면이 압권이다. 서양화로 이야기하자면 옅은 수채화 같은 느낌을 주어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의 풍경화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이런 류의 벽화를 난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화면은 유구천과 유구천변에 형성된 마을,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풍경이라고 생각된다.
유구 벽화거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보이는 그림은 이것이다. 직조기에 올라앉은 할머님의 손길이 너무도 정감 있게, 그러나 조금은 안쓰럽게 표현되어 있다. 인자함이 뚝뚝 묻어나는 옅은 미소 뒤로 보이는 자신의 일에 대한 굳은 자부심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너무도 예술적이다. 공장의 지붕을 고려한 구도 또한 완벽하고.
이 그림이 뷰포인트가 되어 그런지, 사진을 남기기에 적당한 벤치가 그림 왼편 하단에 놓여 있다.
내가 앞에서 여백의 미를 강조한 바 있는데, 아래 사진을 보면 내 말을 절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두 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의 그림이 직조공업의 기계화를 가속화시킨 수직기를 그린 것이라면,
오른쪽의 그림은 전통 베틀에 올라앉으신 할머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전통적인 베틀을 이용하여 가내수공업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할머님과, 현대적 수직기가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시대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 시점을 표현한 그림 속에는 상투를 트신 할아버님이 정좌를 하고 새끼라도 꼬고 계신 것 같은 모습이 보인다. 할아버님 왼쪽에 보이는 것은 가장 오래된 실 잣는 기구인 물레로 보이고.
베틀에 새가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확신은 없지만 비둘기로 추정된다. 유구(維鳩)라는 지명 속의 '구(鳩)'가 비둘기를 뜻하니까 말이다.
섬유를 낳는 실도 그려져 있는데, 색이 과하지 않아서 좋다. 다른 곳의 벽화거리에 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면, 아마도 빨강이나 파랑 또는 노란색이 선명했을 것이다.
실재하는 굴뚝이 마치 그림의 일부분인 듯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역시 옅은 색을 사용하여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 벽화거리의 그림을 그리신 분은 절제의 미학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벽화거리의 모습인데, 만약 이들 그림이 없었다면 이 거리는 슬럼가를 떠올릴 만큼 황량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림이라는 매체는 거리 풍경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위대하다.
그런데 딱히 벽화거리가 아니어도 유구의 벽은 유구의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때문에 유구에서라면, 심심할 틈이 없다. 무수히 많은 작품(?) 중 몇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는데, 지금 다시 봐도 봐줄만하다.
#### 넷째 마당: 유구전통시장
우리네 전통시장을 둘러보는 것은 백화점 등의 현대적 쇼핑공간을 둘러보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기 마련인데, 하여 유구의 중앙통에 있는 유구전통시장을 찾았다. 공주시의 마스코트와 무령왕릉 출토품 등으로 꾸며진 유구전통시장 표지판.
전통시장 앞에는 꽤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유구전통시장 역시 요즘의 트렌드를 따라 비가 오는 날에도 쇼핑에 불편을 겪지 않도록 쇼핑몰화 되어 있다. 다만 쇼핑몰화 되어 있는 공간의 끝에는 여전히 노천에 나앉은 점포들이 이어진다.
유규전통시장을 찾아서야 처음으로 알게 된 존재가 있는데, 바로 '뿌리갓김치'이다. 보통 갓김치라고 하면 흔히 여수를 떠올리게 되는데, 유구의 뿌리갓김치는 뿌리갓을 가지고 담근 것이라는 점에서 갓의 잎을 가지고 만드는 여수 갓김치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뿌리갓은 유구에서만 자라는데(정확히 말하면 다른 곳에서도 자라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제 맛이 안 난다), 이 때문에 뿌리갓김치는 유구의 특산물로 상품화되어 있다.
뿌리갓김치 제품은 채처럼 썰어놓은 것과 깍두기모양으로 얇게 저민 것의 두 종류가 있는데, 내 입맛엔 후자가 더 잘 맞는다.
바로 구입해서 차의 대시보드에 놓고 인증샷을 남겼다. 우연히 내 집에 들른 처남들도 먹어보곤 맛있다고 하던데, 덕분에 처남들에게도 한통씩 보내주기 위해 재주문을 하였다는...
전통시장을 둘러보는 재미로 치자면, 노점들을 구경하는 것만 한 게 없는데, 한 봉지에 20개는 들어 있어 보이는 뻥튀기가 단돈 2,000원.
이상하게도 충청도에서만 마주치게 되는 셈법인데... 이곳의 찰옥수수는 3개에 5,000원 그리고 5개에 10,000원. 그러니 5,000원을 내고 두 번을 사면 내 수중엔 6개의 옥수수가 있게 된다.
얼핏 이해되지 않는 닭과 얼음이 공존하는 점포인데, 문제해결의 키는 '생닭'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
##### 다섯째 마당: 운보 김기창 생가터(?)
1. 운보 김기창 생가터(?)
청각장애를 딛고 피나는 노력 끝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의 반열에 오른 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 화백의 생가가 유구읍 유구리 427번지에 있다. 혹자는 운보 김기창 화백이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18번지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김기창 화백의 부친인 김승환 씨가 이곳에서 태어났고, 살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김기창 화백의 집터에는 1950년대까지는 문간채와 사랑채 그리고 안채가 있었고, 감나무집이라고 불렸다는데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아래 사진 속의 파란 대문집은 김기창 화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래도 대문 오른쪽 벽 앞에는 '운보 김기창화백 집터'라고 쓰인 안내판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처럼 유구에 김기창 화백이 살았던 집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보통 운보의 집이라고 하면 1984년에 그의 어머니의 고향인 청주에 지은 후에 김기창 화백이 기거했었던 집을 말한다. 아, 운보의 집은 그의 사후에 미술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2. 운보 김기창에 관한 짤막한 이야기
운보 김기창 화백의 (초기) 대표작으로는 1955년작인 '군마도'가 꼽히고 있는데,
정작 김기창 화백이 화단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은 그가 1970년대 중반부터 민화의 표현방식에서 영향을 받아 정립한 화풍인 '바보산수'와 관련 깊다. 이러한 화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는 청산도(1976년작)를 들 수 있다.
한편 김기창 화백에 대해서는 늘 친일활동을 한 작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이는 어쩌면 대표적인 친일화가인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의 화숙인 낙청헌(洛淸軒)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김기창 화백의 부인인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 1920~1976) 또한 유명한 화가였는데, 개인적으론 박래현의 작품을 김기창 화백의 작품보다 더 좋아한다. 특히 피카소를 떠올리게 만드는 1956년작 '노점'은 내 아주 좋아라 하는 작품이다.
박래현은 부엉이 그림을 많이 그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아래 사진 속의 작품은 1950년대 초의 작품으로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부인의 영향을 받았는지 운보 또한 부엉이 그림을 많이 그렸다는 것이다. 아래 사진 속의 작품은 1982년작인 부엉이 鴞.
###### 여섯 번째 마당: Epilogue - 유구천변 풍경
유구천변 풍경이 담긴 사진을 방출하는 것으로 유구 이야기를 끝맺을까 한다. 얕고 잔잔한 물이 흐르는 유구천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절로 잉글랜드의 Button on the water가 떠오른다. 안온하고, 부드럽고, 평화스러운 풍광을 가진 유구... 참 사랑스러운 고장이다.
유구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생각되는데, 내가 찍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유구천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