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지금도 나중에도
전주 - 구례 간 산업도로를 달리다 보면 라플라타라는 카페가 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단아하게 펼쳐진 산 과 그 아래 아기자기 자리한 작은 마을, 보이는 것 모두가 그림이 되는 그야말로 평온함 자체로 존재하는 것 같은 풍경을 배경삼은 카페이다.
사실 이곳은 여수 출장 중에 우연히 알게 된 곳으로 몇 년 전 툭하면 여수 출장을 갈 때 직원들과 가끔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몇 차례 가봤음에도 그곳이 결혼 후 남편과 드라이브 겸 해서 다녀왔던 섬진강 대나무 숲길과 연결돼 있는 곳 이라고는 전혀 매치를 하지 못했다.
길치인 내가 여러 번 와보고도 "여기 처음 지나가는 길이지?" 묻는 통에 남편은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길치 딱지를 나에게 붙였다.
"여기가 거기네? 세상에 젼혀 몰랐네"
눈을 깜빡이며 몇 번을 묻는 내게 남편은 "그때 카페는 없었고 무슨 주유소 같은 게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주유소가 조금은 특이한 모양을 갖춘 대형카페로 변신했다.
남편과 커피를 마시며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씨에 따라 변하는 섬진강변의 풍경을 바라보니 이런 곳에 집을 짓고 하루하루 를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후 아파트에 살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들었고 적적하리 만큼 한적한 곳이 그리울 때면 진도에 살고 있는 언니집에 방문하는 걸로 잠깐이나마 전원생활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 보기도 하였다.
남편은 전원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지켜야 할 게 많은 -그중에서도 특히 소음-공동생활이 필수인 아파트 생활은 쉬운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거다.
층간소음으로 아랫집에 불편을 줄까 봐 80킬로 넘는 남편이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고, 집안의 의자란 의자에 모조리 신발을 신겨두고 혹여나 뭐라도 떨어뜨려 아랫집 사람 놀랠라 조심조심.
나는 내 집이 불편해지고 있다.
윗집서 나는 소음에 몇 번을 말할까 말까 참고 참다가 조심스레 붙여놓은 쪽지가 무색하게 오늘도 여전히 쿵쾅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다.
이게 집인가 말이다.
아파트처럼 편하진 않지만 적어도 시골에서 살 때는 남의 집 눈치 안 보고 맘껏 떠들고 마당을 뛰어다녀도 누구 한 사람 지적질 하거나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런 곳이야 말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진정한 곳이 아닐까.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커피를 마시고 카페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찰칵찰칵 사진도 몇몆 장 남기고 아래로 내려갔다.
섬진강 대나무 숲길.
얼추 5년이 넘었을 것 같은 그곳을 다시 온 것이다.
그대로였다.
약 2킬로 정도로 길지 않은 산책로지만 울창한 대나무가 빽빽하게 숲을 이룬 그 길을 걷다 보니 왠지 모를 비현실감이 나를 감쌌다.
바람에 대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청량하게 귓가를 맴돌고 땅에서 솟아오른 작은 준순은 하루에 1미터씩 자란다니 눈앞에서 키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을 호기심이 일었다.
녹음으로 우거진 그 길을 따라 한없이 가면 무협만화에 한 번쯤은 나왔을법한 신선을 거기서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신비한 느낌마저 든다.
예전에 왔던 그때나 지금이나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겨주는 그 길이, 넘치지도 미치지도 않은 자연의 작은 품을 옮겨놓은 듯한 그곳이 친숙하고 익숙해 마음이 편안해졌다.
걷다가 중간중간 샛길로 나가 섬진강을 바라보니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마저도 오래전 그때와 변함이 없다.
자본주의의 시대에 맞게 산을 깎고 들도 깎아 음식점을 짓고 카페도 짓고 현대인들의 삶에 발맞추기 위해 자연도 희생을 감내하고 있다.
자꾸만 민둥산이 되어가는 나무가 사라지는 숲을 보면 내가 벌거벗기라도 한 듯 마음이 스산하고 나와 공생해야 할 자연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산 - 이 무너지는 듯 해 나도 모르게 쯧쯧 혀 차는 소리가 신음하듯 터져 나온다.
유럽사람들이 몇백 년 도 더 된 건축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투자를 하고 애쓰는 것처럼 우리도 더 이상은 개발을 위한 투자보다는 고유한 것 들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더 이상은 눈 떠보니 앞산 하나가 사라져 있고 또 어느 날 눈떠보니 그곳에 골프 연습장이 떡 하니 들어서 있는 낯선 풍경을 마주하는 일 은 없었으면 좋겠다.
집으로 돌아와 몇 해 전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보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섬진강 대나무 숲길에서 남편과 나는 세월의 흔적만큼 달라진 얼굴로 같은 길에 똑 같이 서있었다.
그냥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두 사진에서 우리가 짓고 있는 표정마저 비슷해 지나온 세월이 우리 둘에게 큰 역경의 나날들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삶이 나에게 주는 가치는 그렇게 내가 존재했던 시간들이 그때에도 지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어느 순간에 생겨나기도 한다.
언젠가 다시 우리가 그 대나무 숲길에 또다시 서게 되는 그날, 남편과 내가 남길 세 번째 사진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같은 표정으로 지나온 세월만큼의 주름살만을 얼굴에 새긴 채 서로에게 따듯한 시선을 마주하게 될 그날이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