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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렙 Jan 17. 2024

세탁기 앞에서 울어본 적 있나요?

자신만의 작은 쉼터를 찾아보세요.



집에, 아니 방이라 부를 만할 공간에 들어왔다. 유난히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던 무거운 가방부터 얼른 내려놓는다. 어깨가 가벼워진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네.




어깨와 다르게 마음만은 가벼워지지 않아, 빨래를 돌린다. 물이 들어차기 시작하는 세탁기 앞에 앉았다. 세탁기 문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있는 내가 보인다. 한숨을 쉰다. 아니 저절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았네.




내 형상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도어 가장자리 재질 때문에 생기는 왜곡인지, 아니면 내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탁기통에 물이 채워지는 시점에, 서서히 내 눈에도 물이 들어차기 시작하는 것 같다. 눈앞이 몽글몽글해지는 걸 보니.

4캔에 1만 원, 아니 1만 2천 원하는 맥주라도 하나 할까 싶다가. 그게 한 캔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둔다. 이런 날은 술이라도 취하면 진짜 꼴사납게 취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앉아만 있다. 별 다른 걸 할 수 없어서. 아니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할 힘이 없어서.

불멍, 물멍, 강아지멍, 고양이멍처럼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지면서 차분해진다고 한다.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하고 세탁기 앞에 앉은 것이다.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며 빨래멍을 한참 동안 때리고 있다.      




통 안 빨래들이 서로 얽히며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어지러울 줄 알았는데 정말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불이나 물도 서로 얽히고 섞이는 움직임을 보면서 멍하니 있는 거였네.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며 생긴 상처들 때문에 괴로운 건데. 그걸 얽히고 섞이는 걸 보며 마음을 진정시킨다니. 아이러니하다. 웃기다는 생각을 한다.




세탁이 끝났다. 좁은 세탁통 안에서 돌아가느라 고생한 빨래들을 꺼내기 위해 문을 연다. 문 가장 가까운 빨래를 집어서 당기는데 안 빠진다. 웬걸 다른 빨래들과 단단하게 꼬여 있다. 내 마음이 꼬여 있어서 그런지 세탁기의 빨래들마저 평소보다 더 꼬여 있는 것 같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너네들까지 이러냐’고 짜증을 낸다. 아무도 없는 4평 원룸. 세탁기 소리가 지나간 공간에 소리 지르고 있는 내 목소리만 울린다.  




유독 사람과의 관계가 꼬여 버린 이런 날에는, 건조대가 아닌 건조기에 빨래를 말리고 싶다.



내가 직접 하나하나 꼬인 빨래를 풀어서 널어야 하는 건조대 말고.



꼬인 상태로 넣어도 저절로 알아서 풀리는 건조기에.



관계도, 내 감정도 누가 알아서 풀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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