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춰라
내가 갑작스럽게 퇴사를 결정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mkyu라는 온라인 대학 플랫폼에서 새벽 기상을 시작한 것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김미경’ 강사의 미니강의를 20분 정도 듣고 나머지 시간은 계획한 대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이를 SNS에 인증한다. 이를 514 챌린지 라고 하는데 매월 1일부터 14일 동안 새벽 5시에 진행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514 챌린지는 삶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는 나 자신을 다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챌린지를 계속하다 보니 굿짹월드라는 커뮤니티도 알게 되고 굿짹월드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진행하는 미니챌린지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한 번은 ‘느리게 자라는 아이의 자존감 성장 챌린지’라는 미니챌린지에 참여했다. 열흘 동안 매일 아이와 사진 찍기, 틱톡 찍기 등 재미있게 진행할 수 있는 소소한 과제가 주어지는 챌린지였다. 굿짹월드 커뮤니티 내에도 ‘느리게 자라는 아이’들을 키우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 챌린지는 종료되었는데 카카오톡 방은 후일의 정보공유를 위해 남겨졌다. 어느 날 단톡방에 ‘사랑듬뿍거북맘’이라는 분이 ‘꼬부기 엄빠 북클럽’ 모집글을 올렸다. 내용을 보니 느린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끼리 육아 관련 책을 읽으면서 공부도 하고 서로 정보공유도 하자는 내용이었다. 참가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 바로 신청했다. 호야가 느린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관련된 책을 여러 권 구매했는데 막상 혼자 책을 읽으려니 해당 내용을 읽기가 싫고 집중이 되지 않아 고민하던 참이었다. 이 북클럽에서는 매달 책 한 권을 읽고 일주일에 한 번씩 비대면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12기가 진행 중인데 나는 1기부터 계속 참여했다. 북클럽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꼬부기 엄빠 북클럽’ 네이버 카페를 검색해 보실 것을 추천한다.
이 북클럽에서 첫 번째로 읽은 책이 데보라 레버의 ‘우리 아이는 조금 다를 뿐입니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의 작가인데 아이가 두뇌회로가 다른 아이라서 교사들을 자극하는 행동으로 학교에서 자퇴를 권유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 책은 저자가 아이를 홈스쿨링하며 얻은 여러 가지 인사이트를 공유하고 매 소단원마다 자신과 아이의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기록할 수 있는 형식이 들어있다. 평일에 매일 주어진 분량을 읽기가 쉽지는 않았는데 치료실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짬 나는 대로 열심히 책을 읽고 과제를 작성했다. 이후에 내가 ‘느린아이 엄마끼리 힐링수다 (늬희수)’라는 미니챌린지를 진행하면서 이 책의 내용을 많이 참고했다. 틸트패런팅 웹사이트(tiltparenting.com)에서 신청하면 저자가 ‘열 가지(10-things)’라는 짧은 영상을 열흘 동안 메일로 보내준다 (https://tiltparenting.com/10-things/). 느린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 세계에 처음 입문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대본도 같이 제공한다. 요즘은 웹사이트 번역이 바로 가능하니 원문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틸트패런팅 웹사이트에서 신청하는 것을 추천한다.
먼저 ‘열 가지’ 중 첫 번째 꼭지를 나의 경험과 버무려 공유하고자 한다.
잠시 멈춰라 (Take a pause)
아이가 두뇌회로가 다른 신경다양성을 가진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부모들에게 가장 중요한 조언이다. 먼저 용어정리부터 하자. 한국에서는 ‘느린 아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사실 나는 이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느린아이’는 소위 정상이나 표준에 비교하는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신경다양성(Neurodivergence)을 가진 아이 또는 두뇌 회로가 다른 아이(Differently wired children)가 더 적합한 용어이다. ‘두뇌회로가 다른 아이’에는 여러 진단명이 다 포함된다. ADHD, 자폐스펙트럼, 학습장애, 경계선 지능, 사회 행동 문제등 여러 가지 하위 범주가 있다. 또한 소위 느린 학습자라고 불리는 ‘경계선 지능’을 ‘경계성’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확한 용어는 경계선 지적 기능(BIF, Borderline intellectual functioning)이다.
“왜 이제 오셨어요?, 이런 아이들은 보통 5세에 옵니다. 얘는 학교 들어가야 되는데요.”
호야가 일곱 살에 소아정신과에서 발달검사를 하고 결과 상담을 하러 갔더니 정신과 의사가 한 첫마디이다.
그래서 아이가 말이 느려 30개월 즈음에 언어치료를 7개월 정도 했고 아이가 말이 트여 그만두었다. 아이 돌 즈음부터 내가 인턴과정을 시작하여 친할머니와 베이비 시터가 전담해서 키웠다고 말했더니 의사가 한숨과 함께 한마디 한다. “양육환경이...” 그러면서 감통치료든 뭐든 할 수 있는 건 모두 바로 시작하라고 했다.
이런 말을 들은 엄마는 당연히 죄책감과 다급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일 년간 전임의로 근무 중이었는데 발달검사 결과를 듣고 틈나는 대로 집 근처의 치료실을 알아보고 퇴근 후에는 인터넷 검색을 하며 관련 정보를 찾는데 몰두했다.
집 근처의 치료실에 갔더니 치료사는 나에게 “얼마나 치료하실 수 있나요? 횟수는 어머님이 정하세요. 하는 만큼 아이에게 도움 됩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아이를 데리고 다닐 시어머님의 사정도 고려해야 해서 일주일에 3번이라고 말했다. 때때로 이때도 이미 치료가 늦었는데 내가 일을 바로 그만두고 아이를 매일 데리고 다닐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한다.
아이가 비전형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부모들에게 데보라 레버는 ‘잠시 멈추라’고 조언한다. 다음은 데보라 레보가 말한 내용이다.
당신은 지금 당장은 압도감, 두려움, 슬픔을 느끼거나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압도당하거나, 정보가 전혀 없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일단 잠시 멈춰 서보라.
아이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정보를 소화하는 시간을 가져라. 이 시간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아이에게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어느새 ‘해결 모드’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아이에 대한 소견을 말하면서 ‘늦었다’,‘왜 치료를 더 일찍 하지 않았나?’ 이런 류의 말을 할 수 있고 즉시 치료를 시작하라고 권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견을 듣는 부모는 이 모든 것이 매우 급박하게 느껴지며,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너무 늦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는 급박하게 결정하기 전에 시간 여유를 가져야 한다. 잠시 멈추고 숨을 돌릴 시간이 있다. 새로운 정보를 소화하고 나름대로 조사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 가족의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나와 자녀에게 지지와 긍정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잠시 멈추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정신없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쳇바퀴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가족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에게 통찰력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의 가치관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 당장 어떤 지원이 가장 필요한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니 나에게 필요한 시간을 갖고 다른 사람이 나와 아이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정이나 의제를 강요하지 않도록 하자. 항상 나 자신이 운전석에 앉아 있음을 잊지 말자. 우리는 나에게 편안하고 나와 우리 가족에게 가장 긍정적인 방식으로 앞으로 나아갈 권리와 자격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 멈춰 서서 숙고할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크고 작은 일이 끊임없이 생기기 마련이다. 부모는 이에 대처하고 아이를 위한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하는데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잠시 멈추라”는 말을 상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