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퇴근이 아니라 마음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는 것
현관문 디지털 도어록의 경쾌한 해제음 뒤로 집 안을 채운 것은 무거운 침묵이었다.
집 안을 채운 것은 무거운 침묵이었다.
아침에 허둥지둥 집을 나설 때 남겨두고 간 어제의 공기가 뺨에 와 닿았다.
분명 나의 공간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소란스러운 회의실 한복판에 붙들려 있었다.
하루는 끝났지만 내 안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머릿속에서는 고장난 필름처럼 오늘의 불편한 장면들이 쉼 없이 돌아갔다.
싸늘하게 식어있던 팀장의 눈빛, 변명처럼 더듬거리던 내 말투, 어색하게 흘렀던 회의실의 침묵까지 그때 깨달았다.
문제는 퇴근이 아니라 내 마음은 아직도 그 회의실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애써 잊어보려 TV를 켰지만 흘러나오는 드라마 속의 웃음소리는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보았지만 익숙한 멜로디조차 웅성거리는 내 마음의 소음을 덮어주지 못했다.
왜 그깟 말 한마디가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걸까 정처 없이 떠도는 감정의 파편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서러움이 밀려왔다.
문득 습관처럼 켠 스마트폰 화면에 메모앱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던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텅빈 화면에 지금 느낀 감정들을 낱낱이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분노
억울함
위축됨
부끄러움
서러움
피로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글자가 새겨지는 순간마다 마음속의 폭풍이 잦아들었다.
마치 마법처럼 이름이 붙은 감정은 더 이상 나를 통째로 삼키지 못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듯했다.
'그래 나는 오늘 그런 감정들을 느꼈던 거구나'
화면에 적힌 마지막 단어를 조용히 응시했다.
"잘 견뎠다. 나도 알고 있다."
여전히 모든 것이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밤 나는 처음으로 요동치는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봐 주었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지러운 감정이 잔해 속에서도 내일은 오늘과 다른 숨을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희미한 예감이 촛불처럼 작게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