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미뤄둔 작은 일부터 해치우기

남을 위한 무언가 보다 나를 위한 작은 무언가를 해야할 때

by 여유한잔

어제 나에게 처음으로 괜찮다고 말해준 그 문장 때문이었을까.


오늘은 나를 위해 작은 무언가라도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옅게 피어올랐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주말 아침이었다.


무심코 방구석을 바라보다 몇 달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먼지 쌓인 택배 상자와 눈이 마주쳤다.


한창 힘든 시기에 친구가 보내준 선물이었다.


고마웠지만 그때의 나는 그 선물을 열어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상자를 볼 때마다 외면하고 싶었던 그날의 무력감이 떠올라 나는 애써 그것을 없는 존재처럼 여겨왔다.


오늘 나는 그 상자를 향해 처음으로 걸어갔다.


상자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다시 외면하고 돌아서고 싶은 익숙한 충동과 오늘만큼은 달라지고 싶다는 낯선 마음이 부딪쳤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겨우 상자 위로 손끝을 뻗었다.


마른 수건으로 먼지를 닦아내자 상자의 원래 색이 드러났다.


커터 칼로 테이프를 끊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방안을 울렸다.


테이프가 잘려나가자 덜컥 겁이 났다.


이 안에 담긴 과거의 감정을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다시 상자를 닫아버릴까. 아주 잠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스쳤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상자 덮개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예쁜 머그잔과 짧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서툰 위로가 담긴 친구의 글씨를 보자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머그잔을 깨끗이 씻어 선반에 올려두고 편지는 서랍 속에 소중히 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주전자에 물을 끓여 그 머그잔에 따랐다.


두 손으로 잔을 감싸자 기분 좋은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천천히 전해져 왔다.


그 온기 덕분이었을까 신기하게도 다음 할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뤄뒀던 우편물들을 정리하고 시들어가던 화분에 물을 주었다.


행동이 행동을 낳았다.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방 한가운데 잠시 서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먼지를 걷어낸 바닥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 보였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먼지가 쌓여 있던 공간에 빛이 들자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창문에도 희미한 틈이 생기는 것 같았다.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 말보다 먼저 나를 위로한 건 내 두 손의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조금 더 정돈된 방 안에서 메모장을 켰다.


"정리된 책상 한 켠처럼 마음에도 작은 여백이 생겼다."


내가 만든 이 작은 여백을 내일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처음으로 내가 채워갈 수 있는 내일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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