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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아 Nov 30. 2023

가을을 보냈다

10월 말에 텃밭의 식물들을 다 뽑아 버렸다. 

우리 집 텃밭에는 허브로 로즈메리, 민트, 페퍼민트 가 있었고 

식용으로는 방울토마토, 멕시칸 고추, 근대, 고수, 꽈리고추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미 5월에 심었다가 7월 열매를 맺기 시작할 때 내가 한국을 가게 되었다. 

한 달 뒤에 오면 다 말라죽어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열매들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지만 줄기는 아직 말라죽지 않았었다. 

허브들은 싱싱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허브는 그대로 두고 식용작물들은 다시 심었다. 

햇살이 좋으니 이모작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였다. 


하지만 남국의 햇살은 전성기를 넘은 듯했다. 


애매~~~  했다. 

모든 것이 중간에서 머물러 있었다. 

9월 중순쯤 열매를 하나 둘 맺는 듯하더니 계속 그대로였다. 

파랗게 열린 방울토마토는 몇 개 좀 빨개지더니 그냥 파란채로 세월만 보내고 있었고 

감자처럼 커져야 할 멕시칸 고추도 그냥 처음 며칠 자란 채로 버티고 있었다. 

꽈리고추도 몸집을 불려 가며 주름을 잡아가야 하는데 그냥 풋고추같이 매끈한 얼굴로 희희낙락이었다. 

근대는 자라기도 전에 벌레들의 밥이 되어 버렸고 

봄에는 너무 빨리 자라 쇠서 아깝게 버려야 했던 고수는 아주 간신히 힘든 세월을 버티는 듯했다. 

작물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역력히 보였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보았다. 

이쪽은 10월의 낮의 햇살은 20도를 넘으니까



가을에는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는다'는데 나름 잘 버텼다. 

결국 11월이 오기 전에 그래서 그들을 놓아주기로 했다. 

현재까지 맺은 것들은 잘 따서 모시고 

그들의 뿌리를 뽑아 편히 눕게 해 주고 

그동안 수고 많았다, 주인 잘 못 만나 고생했다, 편히 쉬거라, 작별인사를 고했다.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 식물들과 나와의 인연이 그렇게 살갑지 않았음에 심히 미안하다. 

먼 훗날 반대의 위치로 인연이 맺어진다 해도 '이모작의 욕심'을 귀여운 실험정신으로 이해해 주길 바라며 

그들과 함께 가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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