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1
어려서부터 몸에 밴 폭력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두려움 탓에, 조금 전 당할뻔한 강간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이유도 없이 나를 죽이려 했던 까만 앞니의 기억 탓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연홍이를 향해 한 마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는 아랑곳 않고 머플러를 밟고 서서 발을 구르기 시작한다. 발을 바꿔가며 밟기도, 신발바닥으로 짓이기고 비비기도 하며 머플러를 괴롭히는 그녀는 벌써 숨이 차다. 대개의 경우라면 얼굴이 붉어질 테지만, 그녀의 얼굴은 되려 더 창백해지기만 한다. 비록 격하지만 잠깐일 뿐이었는데도 유약한 그녀의 이마에는 벌써 땀이 맺힌다. 그녀의 얇고 색 옅은 머리칼이 땀에 젖어 얼굴 여기저기에 엉겨 붙는다.
금세 온 힘이 빠진 연홍이 동작을 멈춘다. 그녀는 코와 입으로 가쁜 숨을 몰아서 쉬더니, 호흡이 정리되기도 전에 두 남자를 향해 큰소리로 소리친다.
노인은 연홍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헴-하고 엉덩이를 떼는데, 태호는 만지작거리던 빈 잔을 내려놓기만 할 뿐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보다 못한 방귀쟁이 노인이 거든다.
태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손깍지를 한채 두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서 한참을 고민하더니, 다시 깍지를 풀고 오른손 엄지로 입술 가장자리를 긁으며 겨우 대답한다. 하지만 대답은 노인이 아닌 연홍이를 향한다.
연홍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부지런히 입술을 놀려 다그치자 태호가 동을 단다.
어리숙하다. 아니, 바보천치가 따로 없다. 불사조 태호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로 두 남녀를 번갈아 쳐다본다.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호텔의 커다란 유리벽을 향해 아예 등을 보이고 돌아선다.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인상을 찡그리더니, 연홍은 주머니를 뒤져 금색으로 반짝이는 신용카드를 태호에게 내던지며 말한다. 카드는 태호의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어쩌면 좋을까, 저 멍청이를. 내가 도와줄 방법은 없어 보인다. 연홍은 고개를 옆으로 반쯤 기울이더니 갑작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태호는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얼굴을 붉힌 채로 바닥에 떨어진 신용카드를 빤히 쳐다볼 뿐이다. 이제부터는 기싸움이다. 연홍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실눈으로 태호를 흘기고는 나를 향해 말한다.
연홍은 무언가 확신에 찬 얼굴로 내게 말한다.
「다리 좀 벌려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