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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Mar 24.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06화

목적-3

{ 벗, 미치광이 - 제2권 05화 }에서 이어집니다.


 잊고 있었다. 사람은, 표정으로도 욕을 할 수 있다. 느릿느릿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운전하던 태호가 내 말을 듣고서는 고개를 돌려 나를 쏘아보는데,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골고루 구겨져 있다. 얼굴의 전체는 불편함을 풍기면서도, 눈빛으로는 한심함을 발하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나는 그런 말을 꺼냈을까.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이고 어차피 후회하기에는 늦었다. 실은, 대단히 후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 어쩔 건데. 무슨 말이라도 해봐라, 이 갑갑한 아저씨야.

 「이런 상황에 너는……!

태호가 말을 꺼내려하는 찰나 뒤따르던 차가 짧은 경적과 함께 상향등을 번쩍여,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되돌려 운전대를 두 손으로 잡는다.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한 번 뿜을 뿐, 말을 잇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진작에 그래줬으면 얼마나 좋아.


 딸깍거리는 방향지시등 소리가 한참 이어지더니, 태호가 큰길 오르막 끝자락에서 우회전을 한다. 그 직후 차가 좁은 도로로 채 들어서기도 전에 태호는 다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어 나지막한 오르막길에 위치한 호텔 입구로 차를 몬다. 연이은 우회전으로 내 몸이 저절로 왼쪽으로 기운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기울여 균형을 잡으려 해 보지만 몸은 자꾸만 왼쪽으로 활처럼 기울어진다. 넓게 아스팔트가 깔린 주차장에 이르러서야 나는 비로소 몸을 바로 세운다. 태호가 주차장 귀퉁이에 후진으로 주차를 마치자 연홍은 개운하게 잠을 잤던지 두 팔을 앞으로 뻗으며 기지개를 켜고, 나와 사장은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호텔 주차장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상록수가 벽을 두르듯 심어져 있다. 드르륵-하고 주차 브레이크를 당기는 소리가 나고, 이내 태호가 자동차의 시동을 끄며 말한다.

 「내리시죠, 다들.


 기분은 멀쩡한데 반해 내 몸은 차에 타기 전 보다도 기력을 잃은 듯, 자동차 문을 여는 일조차 버겁다. 문은 밀어서 열어야 하는데 어째서 손잡이는 안쪽으로 당겨야 하는 걸까. 세상은 바라는 것과 반대로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다. 늙은 사장과 연홍이는 일찌감치 차에서 내려 잡담을 나누며 나를 기다리고, 태호는 차에서 몇 걸음 떨어진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입에 문채 몸을 풀고 있다. 와이셔츠가 허리춤에서 빠져나왔고 지나치게 지저분할 뿐, 지금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고속도로 졸음쉼터에서 잠을 쫓는 영업사원의 모습이다. 굳이 담배를 입에 물고 저러고 싶을까-하는 의문이 들지만 보기에 나쁘지는 않다. 그가 머리 위로 깍지를 하고 상체를 좌우로 움직이자 이따금씩 군살 없는 배가 드러난다. 거기에는 배꼽의 위치를 가리키기라도 하듯이 가운데에서 아래로 털이 가지런하게 자라 있다.


 나는 왼손으로 문 손잡이를 당긴 채 오른쪽 어깨로 문을 밀어 열어젖힌다. 알맞게 열렸을 때 손으로 문을 멈추려고 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문은 바깥의 무언가에 부딪혀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움직임을 멈춘다. 문이 조금도 튕겨나지 않고 부딪힌 모양 그대로 유지되는 모양이 신기하지만, 이런 걸 신기해할 계제는 아니다. 모두들 밖에서 멀뚱하니 지켜만 볼 뿐 나를 도우러 올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결국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 밖으로 나가야 한다. 먼저 오른발을 차 밖으로 내민다. 그리고 젖혀진 문틀 위쪽을 왼손으로 잡고, 차체를 오른손으로 짚어 몸을 일으켜 세운다. 남은 발을 밖으로 꺼내고, 비로소 나는 자세를 고쳐 열린 문의 안쪽 면을 기대다시피 마주한 채로 선다. 고개를 숙여보니, 나무가 늘어선 호텔의 가장자리와, 아스팔트가 고르게 깔린 주차장을 구분 짓는 낮은 돌담장의 틈에 문의 모서리가 끼어있다. 태호가 입에 문 담배를 손으로 옮겨 들고 코로 연기를 뿜으며 다가온다. 담배가 길쭉한 걸 보니 두 개비째인가 보다.

 「래서 문이 바깥에 부딪히고도 튕겨 닫히지 않았구나!

내가 돌담장에 끼여 움직이지 않는 문의 모서리를 눈으로 가리키며 태호에게 말하자, 둔턱 위에 구부정한 자세로 올라선 태호가 내 시선을 따라 문짝의 모퉁이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그래. 너는 지금……. 그게 신기하구나. 그럴 수 있어, 그래.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좋을까…….」

연홍의 옆에 서있던 사장이 태호의 한숨 섞인 말을 듣고 태호의 옆으로 다가온다. 노인은 문짝의 모서리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태호를 향해 눈썹을 높게 치켜세우며 말을 꺼낸다.

 「이거, 번거롭게 됐구먼. 나는 마실 것이나 좀 사 올 테니……. 마저 고생 좀 해주게.」

노인은 태호의 어깻죽지를 가볍게 한 번 주무르더니 말을 줄이고 돌아선다. 그는 돌아서면서 나를 잠깐 쳐다보지만 눈을 마주치지는 않는다.


 한동안 말이 없던 태호가 와이셔츠를 걷어 올린 양 팔로 문을 잡고서 당겨도 보고 밀어도 본다. 문의 반대쪽에서 몸을 기대고 있는 내 몸도 그에 맞춰 흔들린다. 재미있다. 하마터면 문이 밀릴 때의 반동으로 뒤로 주저앉을 뻔도 하지만, 재빠르게 문을 고쳐 잡아 균형을 찾는다. 태호는 둔턱에서 내려와 아스팔트 위에 선다. 그러고는 내 두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한다.

 「유지야, 비켜봐.」

나는 기분이 좋아 미소로 되묻는다.

 「어디로요?」

 「뒤로.」

불사조는 여전히 무신경하고 설명도 대충 하는 것 같다. 게다가, 균형을 잡으려면 몸을 기대거나 잡을 것이 필요한데 비키라니……. 난처하다. 하지만 까짓, 차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주자. 나는 왼쪽으로 몸을 틀어 차의 옆면을 손바닥으로 짚어가며 뒤 쪽으로 게걸음을 한다. 내 손이 세단의 트렁크를 짚을 즈음 태호가 말한다.

 「어, 그 정도면 됐어.」

뭐가 됐다는 건지 잠시 그의 얼굴을 보면서 유추를 해보는 중에, 그가 난데없이 문짝을 발로 걷어찬다. 그러자 꿈쩍 않던 문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돌담장 틈에서 빠져나와 쿵-하고 닫힌다. 차가 통째로 흔들리는 통에 나는 놀라서 두 손을 트렁크에서 떼고 몸을 뒤로 틀다가 바닥으로 힘없이 넘어진다. 다행히 앞으로 넘어지면서 무릎을 먼저 꿇은 덕에,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는 작은 모래 알갱이가 묻었을 뿐 많이 아프지는 않다.


 「눈 돌려, 이 미친놈아!」

별안간 연홍의 새된 목소리가 호텔 주차장에 울려 퍼진다. 손에 묻은 모래를 털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연홍이는 잔뜩 성이 난 얼굴을 하고 있고 태호는 몰래 간식을 먹다가 주인에게 들킨 강아지처럼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는 하릴없이 시선만 여기저기로 던지고 있다. 호텔 건물로 걸어하던 노인도 연홍의 목소리에 놀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괜히 무안해진 노인이 묻는다.

 「자네들, 마시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하게…….」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이 없다.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던지, 사장은 얼른 몸을 돌려 다시 호텔 입구로 걸음을 계속한다. 노인은 부지런하게 걸음 하지만 보폭이 좁아 그 속도가 느리다. 연홍은 씩씩거리며 태호를 지나쳐 내게로 걸어온다. 그녀는 걸어오는 내내 태호를 쏘아보다가 그를 지나칠 즈음 어깨로 그를 부딪히는데 오히려 그녀의 몸만 뒤로 튕기며 돌아갈 뿐 태호는 꿈쩍도 않는다. 연홍은 눈을 가늘게 뜨고 태호를 째려보다가 대뜸 호텔 입구 계단을 오르고 있는 노인을 향해 소리친다.

 「나는 커피 말고 따뜻한 코코아!」

사장은 한 팔을 들고 아무렇게나 손을 흔드는 것으로 알아들었다는 말을 대신한다. 노인이 호텔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연홍이는 엎어져 있는 내 앞에 선다. 그녀가 내게 두 손을 뻗는다. 나는 상체를 일으켜 팔을 활짝 펼친다.

 「나를 안으려고 하지 말고 손을 잡으라고, 유지야.」

그럼 말을 하던가. 괜히 나한테 심술이다. 그래도 나를 일으키려 도와주는 연홍이가 참 고맙다. 그녀 덕에 일어서기는 했지만 몸을 가누기는 여전히 힘이 들기에, 나는 그녀의 손을 놓자마자 다시 자동차 트렁크를 짚고 선다. 연홍이는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유지야. 거기 말고, 다른 데를 짚는 게……. 아니다. 오빠, 망할 담배 좀 끄고 이리 와서 얘 부축 좀 해. 아, 뭐 하고 있냐고 정말!

 「방금 전에는 보지도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왜 또 부축을 하래?」


 태호가 툴툴거리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내게로 온다. 그는 연홍의 눈치를 보면서 헛기침을 하더니 내게로 팔 하나를 내민다. 내가 두 손을 트렁크에서 떼어 그의 팔을 움켜쥐자 연홍이가 트렁크 뚜껑을 연다. 얼룩진 트렁크 뚜껑에 가려진 그녀는 몸을 숙여 트렁크 속에서 무언가를 한참 뒤적이더니, 이윽고 긴팔 티셔츠 한 장을 꺼내든다. 그녀는 티셔츠를 들고 와서 태호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서있는 허리에 두르고는 양쪽 소맷자락을 앞으로 묶는다. 그리고 내 앞으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팔짱을 끼고서 내 허리춤을 꼼꼼히 뜯어본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번갈아 젖혀가며 살펴보기도, 한 발짝씩 앞뒤로 움직이며 쏘아보기도 하더니, 이내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숨을 내쉰다. 그녀는 빠르게 손을 놀려 묶은 티셔츠를 풀어서 챙겨 들고는 다시 트렁크로 향한다. 이번에 연홍이가 꺼내온 것은 하얗고 커다란 머플러다. 그녀는 이번에도 뒤에천을 허리춤에 두르고 솜씨 좋게 앞쪽으로 매듭을 짓는다. 매듭의 위치를 골반쪽으로 돌리자, 마치 예쁜 치마수영복입은 것만 같다.


 「연홍아,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면서 나한테 이런 걸 둘러주는 거야?」

 「오빠가 네 걸 쳐다보는 것도 꼴 보기 싫고, 그딴 걸 옷이랍시고 입고 있는 너도 싫어. 필요한 게 뭔지 제대로 말도 못 해준 영감탱이도 싫고, 제대로 못 알아들은 오빠도 싫고, 지금 네 아랫도리를 가리겠다고 내 옷을 뒤적거리는 나 스스로도 싫어. 그냥 싫어. 다 싫어.

 「연홍아. 사장님 하나, 너 하나 말했는데, 왜 오빠만 두 가지야?」

 「두 배로 짜증 나는 인간이라 그런가 보지. 그만 됐고, 안으로 들어가자.」

 「실은, 연홍아. 화를 내는 이유가 궁금했던 게 아니고⋯⋯.」

 「유지야, 좀⋯⋯!」


연홍은 앞서 걷고, 나는 태호의 팔을 안고 뒤를 따라 걷는다. 몸은 으슬으슬하다가도 화끈거리는 데다 머리는 현기증이 나고 가시기를 반복하지만, 태호에게 의지하니 비록 느리지만 나름 걸을 만은 하다. 커다란 호텔문을 연홍이 당겨 열고서는 나와 태호를 기다린다. 놓아버리면 저절로 닫혀버리는 문인 걸까. 그녀가 문을 잡은 채로 나와 태호를 보더니 또 언짢은 얼굴로 한 마디 한다.

 「빨리 좀 와라, 정말. 오빠는 어린 여자가 팔에 매달려서 가슴을 비비니까 아주 좋아 죽겠지? 시간이 천천히 가면 좋겠다, 그렇지?」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나는 태호의 팔을 붙잡지 않고서는 걸을 수가 없다. 그런데 태호는 연홍이의 말에 마음이 편치가 않은 모양인지 걸음을 우뚝 멈추며 대꾸한다.

 「알았어, 알았다고. 얘가 일부러 여우짓을 하는 건 아니야. 상태가 안 좋잖아, 알면서 그래.」

 「여우짓인 줄은 아네? 짜증 나게 진짜, 됐어. 알아서들 들어오든가 말든가.」

연홍은 붙잡고 있던 문을 닫으면서 호텔 안으로 걸음을 서두른다. 태호는 한숨을 쉬면서 내 팔을 제 팔에서 떼어낸다.


 호텔 건물로 들어서니 눈이 부시다. 꽤나 오래된 건물인듯하지만 좌우로 둥글게 위층으로 향하는 상아색 계단과 그 사이 높은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가 고풍스럽다. 입을 벌리고 태어나 처음 들어와 본 호텔 로비를 구경하는 중에 사장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다.

 「이쪽이네. 어서 따뜻한  좀 들어.」

로비의 왼쪽,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페에 노인과 연홍이 소파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노인은 가늘게 눈을 뜨고 찻잔을 받쳐 들고 입김을 불어 식힌다. 연홍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팔을 놓게 했더니 허리를 안고 ?」

담대한 척 하지만 주눅이 든 게 분명한 태호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대꾸한다.

  「내가 안은 게 아니고 얘가 안은 거잖아. 이젠 가슴도 안 닿아.」

 「그럼 아까는 닿은 게 맞다는 말이잖아! 등신아!」

 「그럼 네가 좀 부축을 하던가,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나한테 그럴 힘이 퍽이나 있겠다.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와서 앉기나 해. 나, 지금 좀 힘들어. 이해해 줘.」

연홍이는 짜증을 부리다가 지쳐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입술이 파랗게 질려서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는다. 그녀의 앞에는 반쯤 남은 코코아가 놓여있다.


 태호의 도움으로 나도 소파 하나를 차지하고 앉는다. 내 자리에도 연홍이처럼 코코아가 놓여있기를 바랐지만, 내 앞에 놓인 것은 녹색과 흰색이 섞인 이름 모를 음료이다. 몸을 숙여 냄새를 맡아보니 녹차향이 난다. 녹차라테인가 본데, 희한하게도 거품 한가운데에 네잎클로버가 놓여있다. 호기심에 네잎클로버를 집어 들고 손바닥에 놓고 살펴보지만, 종이로 만든 가짜도 아니고 잎 하나를 가져다 붙인 것도 아니다. 보육원 언니들이 시켜서 땡볕 아래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찾고는 했던 바로 그 네잎클로버다.

 「요즘은 네잎클로버도 양산이 되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태호가 잘난 지식을 뽐낸다. 내가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태호가 말을 잇는다.

 「행운도 양산이 되는 세상이야. 그런데 불행한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을까? 내 말은, 당장 여기 둘러앉은 우리 네 사람⋯⋯.」

노인이 태호의 말을 끊는다.

 「거, 자네는 쉰소리 그만하고. 유지 학생, 그것 좀 마셔. 정신을 차리는 데에는 그게 좋다더라고. 달달할 게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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