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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 Jung Mar 31. 2024

[창작소설] 벗, 미치광이 - 제2권 07화

계획-1

{ 벗, 미치광이 - 제2권 06화 }에서 이어집니다.


 데쳐진 나물처럼 흐물거리는 네잎클로버를 황색 휴지 한  위에 내려놓고 녹차라테 잔의 손잡이를 잡아 앞으로 당긴다. 그대로 집어 들려다가 예상치 못하게 묵직한 잔을 엎을하지만 잽싸게 두 손으로 감싸 든다. 이걸 마셔버리면 온기가 사라질까 아쉬울 만큼 손바닥 전체로 따끈한 열기가 기분 좋게 퍼져온다. 나도 연홍이처럼 잔을 감싸 쥐고 몸을 소파 깊숙이 묻는다. 머리끝부터 엉덩이까지 내 몸을 둥글게 감싸주는 이 소파는 기억에도 없는 엄마의 품을 연상케 한다. 녹차라테는 달콤하고 소파는 포근한데 하필이면 엄마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마음이 차게 식는다. 다른 생각을 하는 편이 낫겠다. 기분도 전환할 겸 나는 몸을 오른쪽으로 조금 틀고 다리를 꼬아 앉는다.


 「아이, 진짜. 얘 좀 어떻게 해봐.

순간 태호가 역정을 낸다. 나는 연홍이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려 몸을 튼다. 하지만 연홍이에게서는 딱히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정작 태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한 손으로는 코코아 잔의 손잡이를, 다른 손으로는 잔의 아래를 받쳐든 그녀는 소리 없이 한 모금 또 한 모금을 마시다가 매 틈마다 날이 선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노려본다. 눈치가 없는 친구에게는 친절한 도움이 필요하다.

 「연홍아, 태호 오빠가 널 부르잖아.」

나는 자칫 아이를 타이르는 어른인 척 보이지 않으려 표정에도 주의를 기울여 말했건만, 연홍이는 듣고도 못 들은 척을 한다. 내 말에 그녀의 미간이 일그러졌으므로, 결코 내 말을 못 들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태호의 말에도 일부러 침묵했다는 뜻이 되는데,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연홍이 드디어 입을 연다.

 「야, 유지. 내가 말했지. 네가 입고 있는 그 창녀 같은 바지 좀 잘 가려. 내 머플러까지 버려가면서 가려줬으면 그다음부터는 스스로 좀 가려보라고.」


 연홍이는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역정만 낸다. 제대로 받아쳐야 한다. 하지만 분노는 판단을 흐리는 법. 논리적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짜증 나게 하는 원인을 대충이라도 알아야 한다. 그래, 내 바지가 창녀 같다고 했지. 적어도 나한테 창녀라고 말한 건 아니니까 그건 양보할 수 있다. 하지만 발목까지 내려오는 쫄바지의 어디를 가리라고 하는 걸까. 나는 연홍이의 두 눈을 짧게 쏘아보고, 이내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로 고쳐 앉은 다음 바지를 살펴본다. 허리에 두른 연홍의 머플러 아래, 허리부터 허벅지의 위아래를 살펴보아도 가려야 할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놓지는 부분이 없도록 무릎을 더듬어보고, 고개를 숙여 종아리와 발목 바지 끝단까지 꼼꼼하게 만져본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보이지 않고, 바지 속 내 살이 만져지는 일도 없다. 이제는 내가 받아칠 차례다.


 「연홍아. 첫 째, 이 옷은 내 취향이 아니야. 병원에서 도망쳐 나왔다가 헌옷수거함에서 찾은 옷일 뿐이야. 그 점은 알아줬으면 해.」

 나는 일부러 말을 끊고 그녀의 반응을 살핀다. 그녀는 눈썹을 높게 올리고 두 눈은 질끈 감은채 고개만 몇 번 끄덕인다. 계속 말해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개의치 않는 눈치다.

 「그럼, 계속할게. 이건 긴바지잖아. 반바지가 아니라고. 핫팬츠는 더더욱 아니지. 그렇기 때문에 가려야 할 부분 따위는 있을 수가 없어. 그리고 아직, 이게 끝이 아니야.」

 연홍이 감았던 눈을 뜨고 턱을 당긴 모양으로 팔짱을 끼는 모습에 나는 다급함을 느낀다. 그녀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자세를 고쳤지만 내가 보기 좋게 막아냈다.

 「셋째로, 그나마 어렵게 구한 이 바지가 하필이면 몸에 딱 달라붙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야. 내가 속옷을 입지 않고 있으니까 윤곽이 드러나는 것 역시나 어쩔 수 없지. 엄밀히 말하자면 안 입은 게 아니라 못 입은 거야. 이 커다란 겨울 후드티가 커서 티가 나지는 않지만 난 지금 브라도 입지 않은 상태라고. 아무튼, 이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야. 너도 여자로서 이 점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 몸매가 어떻던 속옷을 입고 안 입고는 자유야. 솔직히 나도 평소에는 속옷을 챙겨 입어. 몸매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하고, 속옷을 입는 게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더 편하거든. 그러니까 잘 좀 가리라느니 하는 말은 그만해 줬으면 해.」

그래, 내가 이겼다. 어디 한 번 다음 수를 둬보라지.


 「유지야. 아휴, 유지야.

연홍이 몸을 숙여 코코아를 내려놓고는 양손으로 무릎을 짚어 몸을 일으키며 말을 꺼낸다. 그녀는 마저 말을 잇기 전에 팔을 좌우로 뻗어 기지개를 켜더니, 탁상을 돌아 내게로 걸어온다. 불사조와 노인은 연홍이와 내게는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고 차를 마실 뿐이다. 잔의 바닥이 보이도록 기울이는 걸 보면 이미 둘 다 마실 것이 남아있지 않을 텐데, 한 방울이라도 남기지 않고 마실만큼 간절한 걸까. 내가 두 남자를 바라보던 중 어느덧 연홍은 내 발치 앞에 서있다. 나는 그녀의 작고 예쁜 발로 시선을 던지다가 그녀의 야-하는 퉁명스러운 말 한마디에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여전히, 참 예쁜 얼굴이다. 가늘고 희미한 핏줄이 보일 듯 말 듯 창백한 피부와 붉은색을 띠는 탁한 눈동자를 나는 바라본다. 다시 한번 야-하는 말로 그녀가 말을 꺼낸다.

 「머플러 돌려줘.

마음이 상할 만도 하지. 되받아칠 말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화를 풀어야 할 테니 내가 이해해야 마땅하다. 처음부터 머플러를 허리에 두른 건 내가 원해서가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어쩌면 화를 푸는 도구일 뿐만이 아니라, 더 이상 가릴 필요가 없다는 내 논리적인 주장을 연홍이가 수용한 것일 수도 있다. 텅 빈 잔 속을 관찰하고 있는 남자들도 나와 생각이 같은지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낼 뿐 별 말이 없다. 머플러의 매듭을 푸는 나를 힐끗 바라보던 태호에게 내가 미소로 화답하자 그는 금방 고개를 돌려 딴청을 부린다. 연홍이는 참 손도 야무지지,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매듭을 마저 풀고서 나는 머플러를 돌돌 말아 연홍에게 건넨다. 그녀는 낚아채듯 머플러를 쥐더니 주변을 살펴보다가 느닷없이 바닥으로 머플러를 내던진다.

 「연홍아, 왜 그래…….」

어려서부터 몸에 밴 폭력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두려움 탓에, 조금 전 당할뻔한 강간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이유도 없이 나를 죽이려 했던 까만 앞니의 기억 탓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연홍이를 향해 한 마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녀는 내 말에는 아랑곳 않고 머플러를 밟고 서서 발을 구르기 시작한다. 발을 바꿔가며 밟기도, 신발바닥으로 짓이기고 비비기도 하며 머플러를 괴롭히는 그녀는 벌써 숨이 차다. 대개의 경우라면 얼굴이 붉어질 테지만, 그녀의 얼굴은 되려 더 창백해지기만 한다. 비록 격하지만 잠깐일 뿐이었는데도 유약한 그녀의 이마에는 벌써 땀이 맺힌다. 그녀의 얇고 색 옅은 머리칼이 땀에 젖어 얼굴 여기저기에 엉겨 붙는다. 


금세 온 힘이 빠진 연홍이 동작을 멈춘다. 그녀는 코와 입으로 가쁜 숨을 몰아서 쉬더니, 호흡이 정리되기도 전에 두 남자를 향해 큰소리로 소리친다.

 「오빠! 그리고 할아버지! 빈 잔 들고서 멍하니 있지만 말고 나가서 체크인이나 좀 해요. 무슨 좋은 구경거리라도 있어요? 그리고 오빠, 오빠 진짜, 눈알 굴리는 소리가 아주 호텔 밖에서도 들리겠더라? 아, 뭐 하냐고 정말 둘 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면 일어서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노인은 연홍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헴-하고 엉덩이를 떼는데, 태호는 만지작거리던 빈 잔을 내려놓기만 할 뿐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보다 못한 방귀쟁이 노인이 거든다.

 「이보게, 일단 일어서지. 남자들이 곁에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으니. 나는 프런트 옆에 줄곧 서있는 양반한테 택시나 불러달라고 해야겠어. 게다가…… 혹여라도 말이지……. 나는 평소 일상하고는 영 딴판인 짓거리를 하기에 오늘 치른 일이 너무 크기도 하고 말이지. 뭣하나, 어서 일어서재도?

 

 태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손깍지를 한채 두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서 한참을 고민하더니, 다시 깍지를 풀고 오른손 엄지로 입술 가장자리를 긁으며 겨우 대답한다. 하지만 대답은 노인이 아닌 연홍이를 향한다.

 「연홍아. 이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이야. 하지 않으려고 했어. 그런데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버림받기가 혹은 혼나기가 두려운 강아지가 으래 하듯이 태호는 고개를 숙인 채 시무룩한 눈을 딱하게 올려 뜨고 뜸을 들인다. 

 「좀! 뜸 들이지 말고 그냥 시원하게 말 좀 할 수 없어?

연홍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부지런히 입술을 놀려 다그치자 태호가 동을 단다.

 「내가 여기를 처음 오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런데…….

 「또, 또, 또! 아, 뭔데! 얘꺼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하기라도 하셔? 아, 이번에도 말 똑바로 안 하면 진짜 죽는다?

 「오늘 네 호텔방 결제하는 날이라며……. 잠깐만! 말할게, 하고 있잖아……. 게다가…… 네가 유지하고 같이 지내겠다고 했으니까, 나는 새 방으로 체크인을 하던가……. 아니면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아직 다 못 끝냈으니까……. 어떻게 할까?

어리숙하다. 아니, 바보천치가 따로 없다. 불사조 태호가 이런 사람이었던가?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로 두 남녀를 번갈아 쳐다본다.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호텔의 커다란 유리벽을 향해 아예 등을 보이고 돌아선다.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도록 인상을 찡그리더니, 연홍은 주머니를 뒤져 금색으로 반짝이는 신용카드를 태호에게 내던지며 말한다. 카드는 태호의 근처에도 닿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오빠! 야, 이…… 이 등신아! 가서 체크인해! 하라고! 맞은편이건 옆이건 가까운 데로 체크인해. 됐지? 이제 좀 가지? 가 주시지요, 좀?

 「너는 그래도 나한테 '야'가 뭐야, 내가 한참 연상인데.

어쩌면 좋을까, 저 멍청이를. 내가 도와줄 방법은 없어 보인다. 연홍은 고개를 옆으로 반쯤 기울이더니 갑작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오빠. 아직도 안 갔네? 지금 자존심 부리는 거야? 내가 이런 남자를 만났던가?

태호는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얼굴을 붉힌 채로 바닥에 떨어진 신용카드를 빤히 쳐다볼 뿐이다. 이제부터는 기싸움이다. 연홍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실눈으로 태호를 흘기고는 나를 향해 말한다.

 「아, 나도 몰라. 유지! 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어떻게 도와주면 돼?」


연홍은 무언가 확신에 찬 얼굴로 내게 말한다.

 「다리 좀 벌려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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